썰렁한 시나리오 한 토막.
(미국에서 태어나 관광이외에는 한국에 머문 적이 없는 장성한) 아들:(영어로) “엄마 아빠 기뻐해 주세요. 우리 회사 한국 지사장으로 나가게 됐어요. 다음 달부터 한국에서 근무해요.”
엄마:(한국어로) “아이고 우리아들 장하다”
아빠:(한국어와 영어 섞어 가며) “야! 한국에는 왜 가냐. 거기 무서운 곳이야. 이북이 언제 밀고 내려올지도 모르는데……. 미국에서 근무하겠다고 해. 아빤 반대야. 절대 안 돼!”
(화가 난) 엄마: “왜 안 되는데요?”(어이가 없다는 듯 따져 묻는다)
아빠: “제 한국가면 군대 끌려간데”(진짜 이유라면서 한숨)
아들: “난 미국사람인데 왜 한국군대를 가요. 말도 안 돼”
아빠: “국적이탈신고를 하지 않아서 그래. 한국 법이 그렇데”
엄마: “?????”
아들: “?????”
썰렁한 콩트 한토막인가? 아니다. 미국서 태어나고 자란 자녀를 둔, 적지 않은 가정이 겪고 있는 코미디 같은 현실이다.
미국에서 태어났고 한국 호적에 올리지 않았어도 부모 중 한명이 한국국적자면 자녀는 무조건 한국인이라는 것이 한국의 국적법이다. 따라서 18세 되는 3월 이전까지 국적 이탈을 하지 않는다면 남자는 병역 의무를 진다. 아들의 기쁜 소식을 듣고도 펄쩍뛰며 반대해야 하는 아빠는 막막한 심정일 것이고 자신을 미국인으로 굳게 믿고 있는 아들로서는 어이가 없을 것이다.
한국정부는 국적이탈 신고를 하지 않은, 미국 여권소지 2세들에게 한국 장기 체류 비자를 내주지 않는다. 갈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한국 여권을 받아가는 것인데 여권을 받게 되면 병역 의무를 지게 되는 것이 골자다.
한국 정부의 해외 영어봉사 장학생(TaLK)으로 선발된 이모(22)군이 미국여권을 들고 LA총영사관을 찾았다가 비자 발급 불가 통보를 받으면서(본보 3일자 보도) 잣대 없이 흔들리는 한국의 불합리한 이중국적 행정이 또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총영사관은 이군이 18세 이전에 국적 이탈 신고를 하지 않아 “한국 사람이므로” 한국 장기체류 비자를 발부 할 수 없다고 했다. 대신 한국 여권을 발급 받아야 하는데 2개월이 소요된다는 것이다. 이군이 한국 여권을 갖게되면 병역이 문제다.
이군의 부모는 한국 병무청에 문의를 해 봤다. 병무청 직원은 “1년에 6개월 이상 한국에 체류하면 군대에 가야 한다”고 답변했다. 주미 한국 대사관 웹사이트 공지사항(notice)에서 “미국서 태어나 한국에서 거주한 적이 없는 2세들은 ‘재외국민 2세’로 분류해 병역을 37세까지 자동 연기해준다”는 ‘재외국민 2세제도’조항을 찾아 문의했지만 대사관 여직원과 영사의 말이 다르다. “공지 사항은 그렇지만 신청자가 없어 소용이 없다”(여직원) “한국 가서 재외국민 2세로 분류되고 병역 연기 신청을 하면 사실상 군대에 가지 않는다”(영사)
병역법과 관련해 한국 정부에서는 아무도 시원한 답변을 내놓지 못한다. 말이 때마다, 사람마다 다른데 누굴 믿고 한국에 들어가나.
만 19세가 넘은 미국 태생 남학생이 국적 포기 신청서를 내고 미국 여권에 한국 비자를 받은 사례도 있다. 한국에서 이민와 시민권을 딴 남자는 나이에 관계없이 국적 포기가 가능하지만 유독 이곳에서 태어난 2세들에게만 연령 제한을 두고 국적 이탈을 불허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다.
해결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한국 정부가 적극 나서면 된다. 조언을 하자면 사면 기간을 두는 것이다. 혹시 몰라서, 게을러서 자녀들의 한국 국적 이탈 신고 기회를 갖지 못한 부모들을 위해 한국 정부는 자진 신고 기간을 두고 이들의 국적 이탈 신고를 받는 것이다. 미국이 평균 10년 주기로 불체자에게 대 사면을 해주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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