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한국마켓에 장보러 갔다가 기분이 잡쳤다. 종업원 서비스가 나쁘거나 유통기한 지난 식품을 산 게 아니다. 배추·사과·고구마·김·두부·냉동생선 등을 혼수감이라도 고르듯이 연신 들었다 놨다 하며 시간을 낭비하는 아내 때문에 짜증이 난 것도 아니다. 그런 짜증은 이민 온 후 30여년간 겪었기 때문에 이골이 났다.
젊은 엄마를 따라 온 꼬마남매가 우두커니 서 있던 필자 눈에 띈 것이 발단이었다. 띌 수밖에 없었다. 술래잡기를 하는지 큰소리로 떠들고 깔깔대며 진열대 사이를 뛰어다녔다. 시끄러웠지만 별수 없이 참았다. 요즘은 아이들이 자기 집은 물론 식당, 학교, 교회 등에서 뛰지 않으면 비정상인 것으로 간주되는 세상이다.
누나와 떠들며 뛰던 꼬마가 채소를 고르는 엄마에게 달려오더니 칭얼댔다. 다른 아이가 들고 있는 풍선을 달라는 것이었다. 엄마가 나중에 사준다고 달래도 막무가내더니 기어코 울음보를 터뜨렸다. 엄마가 풍선 든 아이에게 다가가 “착하게도 생겼네! (풍선 좀) 잠깐 빌려주겠니?”하며 구슬렸다. 아이가 풍선을 건네주자 꼬마는 울음을 그쳤다. 하지만 이번엔 풍선주인 아이가 “앵”하고 울었다. 잠깐만 빌려주기로 한 풍선을 들고 꼬마가 어디론지 달려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아들에게 쫓아가 풍선을 빼앗아온 엄마가 주인아이에게 돌려주고 돌아서며 혼잣말로 “풍선 하나 가지고 울고불고 야단이야…”하며 빈정댔다.
가정의 달 5월이 내일 시작된다. 어린이날(5일)이 어머니날(8일, 한국에선 어버이날)보다 먼저다. 자녀가 부모보다 중하다는 뜻이 아니다. 방정환이 이끄는 색동회가 1923년 일본을 본 따 이날을 어린이날로 정한데서 비롯됐다. 1961년 한국정부가 5월5일을 어린이날로 공식 제정했고 1975년엔 이날이 공휴일로 지정됐다.
어린이날은 나라마다 다르다. 싱가포르는 10월1일, 홍콩은 4월4일, 스페인은 5월 둘째 일요일, 호주는 7월 둘째 일요일이다. 캐나다와 멕시코 등은 1954년 유엔이 ‘세계 어린이날’로 정한 11월20일을, 러시아와 중공 등 공산권 국가들은 1925년 세계 아동복지회의(제네바)가 ‘국제 어린이날’로 정한 6월1일을 지킨다.
미국엔 어린이날이 없다. 1년 365일이 어린이날이다. 한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나라들도 어린이 인권과 복지가 반세기전에 비해 크게 향상됐다. 북한은 해방 전까지 5월5일을 어린이날로 지키다가 1945년 소련을 따라 6월1일로 바꿨다. 안타깝게도 북한에선 올해 어린이날에도 굶어죽는 아이들이 속출할 전망이다.
필자세대의 어린이날도 어설펐었다. 요즘 아이들처럼 고급식당에서 산해진미를 얻어먹은 적이 없다. 미국 구제품이 상품으로 걸린 학예회에서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이라는 어린이날 노래를 목청껏 불렀었다. 윤석중의 그 동요가 많은 가난한 어린이들에게 푸른 꿈을 심어줬다.
엊그제 마켓에서 본 그 응석받이 꼬마도 미국 아이들처럼 365일이 어린이날일 것 같다. 마켓에서 마구 뛰어도 엄마에게 꾸지람 듣지 않는다. 남들이 나무라면 엄마가 대신 나서서 “아이들이 그럴 수 있지 않냐”며 면박 준다. 그뿐 아니라 적당이 울기만 하면 엄마가 남의 아기를 울려서라도 풍선을 빼앗아 준다.
요즘 젊은 한인부모들의 자녀양육관은 개성존중을 위장한 과보호이다. 아이가 야단맞으면 기가 죽는다며 감싸준다. 미국인 아이들은 식당이나 마켓에서 뛰지 않는다.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지만 결코 기가 죽지 않는다. 학교나 사회에서도 멋대로 자란 아이들보다 더 도전적이며 더 좋은 기회와 대우를 받는다.
이번 어린이날엔 젊은 한인부모들이 자녀들을 식당이나 극장에 데려가기보다 자신의 자녀교육관부터 재점검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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