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축 받는 ‘개죽음’
요즘 날씨가 사람을 헷갈리게 만든다. 봄이 실종된 탓에 입하(立夏)였던 어제가 마치 입춘(立春) 같았다. 을씨년스런 겨울날씨가 며칠씩 이어진 후 갑자기 초여름처럼 해가 쨍하고 났다가 금세 또 찌푸린다. 여인네들 옷 치장하기가 무척 어렵게 생겼다.
날씨만 헷갈리는 게 아니라 세태도 혼란스럽다. 일주일전인 4월29일 영국에서 소위 ‘세기적 왕실결혼식’이 열렸다. 전 세계에서 20억명이 TV와 인터넷을 통해 대머리 총각 윌리엄 왕자가 평민신부 케이트 미들턴과 뽀뽀하는 장면을 지켜보며 괜히 황홀해했다. 결혼식장인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버킹엄 궁에 이르는 신혼 퍼레이드 연변에는 60여만명의 시민과 관광객이 몰려나와 신혼부부를 태운 왕실마차를 향해 축하 환호성을 올렸다.
그로부터 꼭 사흘 뒤인 지난 2일 아침엔 워싱턴DC의 백악관 앞에서 요란한 축하 환호성이 터졌다. 오바마 대통령의 10대 맏딸인 사샤가 결혼한 게 아니다. ‘세기적 테러범’ 오사마 빈 라덴이 전날밤 파키스탄의 한 안가를 기습한 미군 특공대원들에 의해 사살돼 바다에 수장됐다는 오바마대통령의 긴급발표를 듣고 몰려나온 시민들의 환성이었다. 2001년 9월11일 빈 라덴의 지령을 받은 테러범들이 뉴욕 무역센터 쌍둥이 고층빌딩을 납치한 여객기 두 대로 들이받아 3,000여명의 목숨을 한꺼번에 앗아간지 10년만의 ‘쾌거’였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이 가장 기뻐했다. 9·11사태 후 빈 라덴 일당을 소탕하겠다며 중동전쟁을 시작한 장본인이지만 이라크 독재자 아담 후세인만 간신히 붙잡아 처형했을 뿐 빈 라덴은 그림자도 못 찾았었다. 중동전의 실질적 총책이었던 딕 체니 부통령도 빈 라덴을 벼락같이 끝장낸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공적을 마지못해 치하했다. 무역센터 폭파현장인 ‘그라운드 제로’엔 테러원흉의 참살을 ‘경축’하는 희생자 가족친지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오바마와 부시와 거리의 시민들은 한목소리로 “정의가 실현됐다”고 선언했다.
빈 라덴은 의당 처단돼야 했다. 그가 테러를 성전(聖戰)으로 호도하며 미국과 전 세계에 끼친 해악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모든 행사마다, 모든 공공건물마다 테러방비가 최우선 순위가 됐다. 아들 가족이 시애틀방문을 마치고 오늘 LA로 돌아가며 공항에서 신발 벗고 허리띠 푸는 것만으로 부족해 전신투시촬영의 모욕을 감내한 것도 그자 때문이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하면, 사람이 죽었는데 경축하는 게 좀 이상하다. 그의 개죽음이 슬프지 않지만 드러내고 기뻐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다. 빈 라덴이 죽은 것이지 테러가 죽은 게 아니다. 그의 사살장면을 백악관 상황실에서 참모들과 함께 실시간으로 목격한 오바마 대통령과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은 환호성을 지르기는커녕 오히려 충격 받은 모습이었다.
‘정의가 실현됐다’는 표현도 어폐가 있다. ‘응징했다’거나 ‘복수했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 같다. 정의를 실현하려면 빈 라덴을 후세인처럼 생포해 법정에 세운 후 의법처단 했어야 했다. 특공대원들이 무장하지도 않은 빈 라덴에 총탄세례를 퍼부어 처형한 후 증거를 인멸하려는 듯, 아니면 후환을 염려한 듯, 그의 사체를 아라비아해에 던져 물고기 밥이 되게 한 것은 애당초 정의실현보다 응징이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백악관 앞과 그라운드 제로에서의 군중환호도 정의실현보다는 원수를 갚았다는 후련함에서 나온 환성이었을 것 같다.
빈 라덴의 처참한 최후를 보며 북한의 김정일이 머리에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그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몹쓸 짓을 했다. 제 명에 죽은 김일성과 달리 만약 김정일이 빈 라덴처럼 벼락 맞듯 최후를 맞는다면 한국 국민들도 ‘정의가 실현됐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을 ‘경축’하지 않는 사람들은, 예전과 달리, 북한만 아니라 남한에도 많을 것으로 보인다. 윤리적으로도 그렇지만 이념적으로도 남한 사람들이 많이 해이해졌기 때문이다.
불과 사흘 간격으로 일어난 세기적 경사와 흉사에 지구촌 사람들이 한결같이 축하하고 환호하는 세태를 보며 필자도 잠시 혼란을 일으켰나보다. 윤여춘(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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