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을 맞아 창고방을 정리하다가 몇 년전 두었던 비닐봉투 하나를 발견했다. 무언가를 소중하게 여기며 넣어두었던 기억이 났다. 열어보니 유학시절과 결혼 후 몇 년 동안 많은 사람들과 주고받았던 백여 통 편지와 엽서들이었다. 어디에 두었던가 생각해 본 적이 몇번 있으나 거의 잊고 살던 편지묶음이었다.
주로 한국과 미국 내의 가족, 친지들과 주고받은 편지들이지만, 그동안 까맣게 잊고 살았던 사람들로부터의 편지 수도 만만치 않았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주고받았던가? 오랫동안 존재조차 잊고 있던 사람들하고도. 그 자리에 주저앉아 편지들을 한 장 한 장 읽지 않을 수 없었다.
빛바랜 편지들은 내 기억에 흔적도 없는 듯 했던 옛 일들을 꿈틀꿈틀 선명하게 살려냈다. 그들과 주고받던 기쁨, 슬픔, 격려, 토론, 한탄은 물론 그 때의 느낌까지 생생하게 재생시켰다. 그들 각각의 고유한 필체는 각각의 눈매, 웃던 모습, 성격을 기억나게 했다. 그들을 향한 아련하고 뻐근한 그리움이 불현듯 밀려왔다.
내가 간직했으니 주로 받았던 편지들이었지만 내가 보냈던 편지들의 초벌편지도 제법 있었다. 그걸 읽으면서는 젊었던 내가 새삼스럽기도 하고 또 다른 나를 발견한 듯 흥미롭고, 부끄럽고, 자랑스러우면서 연민까지도 느껴졌다. 한글 쓸 일이 없어서 인지 흐트러져가는 지금의 필체보다 훨씬 반듯했던 필체를 보며 진짜 나를 찾은 듯 정겹기도 했다.
이메일이 점차 일반화 될 당시, 전산학을 공부하며 매일 컴퓨터와 붙어살았는데도 업무가 아닌 감정 섞인 사적 편지를 이메일로 쓰지 못했다. 연필이나 펜이 아닌 자판을 두드리며 생각을 풀어내는 일이 너무 생소했던 것이다. 머릿속에서 물 밖으로 막 던져진 물고기처럼 파닥거리는 싱싱한 단어들이 손을 자판에 얹는 순간 딱딱하게 굳어지다가 활자화되기도 전에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그랬지만, 오는 이메일의 답장도 하면서 결국엔 익숙하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손으로 쓰는 편지는 고치기도 어렵고 보존하기도 어렵다면서 답답해하고 번거롭게 여긴다. 수정하기 쉽고 순식간에 배달되고 우편료도 없고 저장도 쉬운 이메일 애용자가 된 것이다.
요즘엔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마스카드를 보내면서 카드엔 사인만 하는 대신 활자화 된 긴 사연의 종이편지를 카드 안에 끼운다. 사는 게 워낙 바빠 이메일로도 친지 각각에게 상세한 근황을 전할 수 없게 되었으니 일 년에 한 번쯤 근황을 적은 파일을 작성하여 친지 모두에게 프린트 해서 보내는 것이다. 같은 인쇄물이건만 손으로 쓴 것 같은 활자체로 프린트한 글을 받으면 왠지 더 정감어린 편지로 느껴지는 것을 보면 필체의 시각적 효과가 대단하다.
최근 몇 년 동안엔 근황 적은 글은커녕 크리스마스카드 조차도 제대로 보내지 못했다. 어쩌다가 편지 즐겨 쓰던 일마저 잊고 살게 되었는가. 금년엔 어떻게든 되도록 많은 지인들에게 크리스마스카드를 띄워야겠다. 그리고 받은 편지들이 빛바랜 후에까지도 내 삶에 활력소가 되어주곤 하니 빚 갚는 심정으로라도 편지를 자주 써야겠다. 특히 손으로 쓴 편지를.
김보경 대학강사․수필가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