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리스로 떠도는 계혜옥씨 파란만장 인생 스토리-리버스
▶ 유복한 가정 자라 유명화가 아내서 노숙자로
“이 세상에 아버지와 남편만큼 나를 아껴주고 사랑한 이는 없었어요.”
오클랜드와 에머리빌 일대에서 노숙하는 계해옥(사진)씨가 아버지와 남편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하며 소녀 같은 미소를 지었다 금세 그리움에 잠겼다.
매일 새벽 다른 노숙자와 경쟁하며 알루미늄 캔 등을 모으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계씨를 만났다.
그는 오전에 온갖 폐철류를 모아봐야 10달러를 벌기 때문에 이날 일정의 최종 목적지인 재활용센터에 들리기 전까지는 대화를 나누는 것조차 힘들었다.
재활용센터에서 나와 다시 진을 치고 있는 어느 대형할인매장 뒤편에 이르러서야 마음의 안정을 찾는 듯했다.
장시간에 걸쳐 뒤를 따라다니면서 경계심이 사라지자 그가 노숙자로 살게 된 배경을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한국어로 나이를 묻는 질문에 그는 “음력으로 53년생, 양력으로 54년생”이라고 밝혔다.
70년대 미국에 이민 오기 전 아버지를 따라 일본과 한국에 자주 왕래했고, 그래서 학교도 자주 바뀌었다고 말했다. 그 결과 지금 3개 국어를 구사한다고 덧붙였다.
일본에서 살게 된 배경에 대해 계씨는 “할머니가 평안 선천 출신이었지만, 나중에 일본 시부야에 살았다”라며 “1961년 아버지가 할머니가 계신 시부야에서 ‘피에르’라는 카페를 열어 크게 성공했다”고 유년 시절 기억을 회상했다.
그는 어릴 적 가장 좋았던 추억으로 시부야의 카페와 그 보다 더 어릴 적 서울에서 경찰서장을 지낸 아버지를 따라 경찰서에서 놀던 기억이라고 했다.
계씨가 미국에 온 이후의 생활 역시 파란만장했다. 그는 1980년대 ‘플리퍼’라는 폴카(동유럽 민속악의 일종)밴드의 드러머로 활동했다.
그러다 ‘4대째 미치광이 화가’로 알려진 프레드 그리핑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리핑씨는 소살리토를 비롯해 미 서부지역 일부 갤러리에서 그의 작품이 지금도 전시될 정도로 인정받는 화가였다.
사랑하는 사람과 사는 것은 행복했지만 순수미술을 하는 화가의 아내로서의 삶은 궁핍했다. 부부가 자동차 안에서 생활할 때도 있었다고 한다.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 계씨가 길거리에서 살기 시작한 것은 그리핑씨가 작년 12월23일 세상을 떠나면서부터다.
계씨도 영문이름 ‘미스 케이’로 인터넷 검색을 하면 베이지역 일부 음악계와 미술계 인사들에겐 나름대로 유명 인물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의 한국어 이름을 발음하기 어려워서인지 그를 아끼는 이들은 계씨를 ‘미스 케이’라고 불렀다.
계씨는 가슴이 아플 수 있는 질문에 대해 우회적으로 설명했다.
미국에 어머니나 형제들이 살고 있냐는 질문에 대해 배 부위를 가리키며 “나를 길러준 양어머니가 수술해서 아기를 못 낳고 친엄마는 딱 한번 만났다”며 말을 아낀 후 “그래도 아빠가 나를 아주 많이 예뻐했지”라고만 대답하고 카트를 끌며 자리를 떴다.
<서반석 기자> seobs@koreatimes.com
계해옥씨가 알루미늄 캔을 줍다가 기자의 요청에 환하게 웃어보이고 있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