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동네 골목길과 큰 길이 만나는 삼거리 교차로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나를 향해 정장 차림에 베레모까지 쓴 한 젊잖게 생긴 미국 노인이 정중하게 거수경례를 하며 건너갔다. 예상치 않은 그의 행동에 나는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여 답례를 보냈다.
곧 이어 파랑색 신호로 바뀌는 바람에 좌회전해 차를 몰면서 왜 그 노인이 나에게 그런 인사를 보냈을까 몹시 궁금해졌다. 혹시 동양에서 근무했던 군인이어서 호감을 표시하기 위한 제스처인지 아니면 그냥 누구에게나 습관적으로 하는 아침인사인지 이런저런 추측을 해도 딱 잡히는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 오후 집으로 퇴근하는 길에 그 교차로를 보면서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그 곳에는 보행자를 위한 횡단보도가 그려져 있었다. 요즈음 정지신호에서 보도 선을 침범하여 차를 세우는 운전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특히 이민자 그룹에서 그런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이는 사소한 일로 여길지 모르나 분명 보행자의 안전을 위태롭게 만드는 행위이며 교통법규를 어기는 처사이다. 그 미국노인은 모처럼 횡단보도 선을 넘지 않고 제대로 정차시킨 운전자를 보고 경의를 나타낸 것이 아니었나 싶다.
미국의 한인동포들은 매일 한국의 TV나 신문을 보게 되는데 나날이 발전하는 모국의 모습에 큰 자부심을 느끼며 살고 있다. 하지만 물질적인 성장에 비하여 시민의식은 오히려 옛날보다 퇴보하고 있어서 우리를 안타깝고 슬프게 만든다.
그 중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점은 남녀노소 너나없이 전반적으로 법을 지키지 않는 나쁜 습성이다. 머리 좋고 똑똑해서 어디에 내놔도 뒤떨어지지 않는데다가 세계 각처를 누비며 좋은 점을 많이 보고 들은 대한민국 국민들인데도 말이다. 벌써 여러 번 촛불시위를 벌였어야 했을 이런 범국민적인 국가운동에는 어째서 수수방관만 하고 있는지.....
오늘날 한국에서 야기되는 모든 문제는 법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훌륭한 법규와 제도가 있다 해도 지키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으랴. 법을 준수하지 않는다는 것은 남을 배려치 않고 나의 유익과 편리만을 앞세우는 이기심이며 정직하지 않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법이 무너지면 민주주의도 자유도 인권도 사라지고 다만 무질서와 분쟁만 남을 뿐이다.
지금의 한국은 자유가 너무 방임되어 사회 전체가 혼돈 속에 헤매고 있는데 그럼에도 오히려 그 확대를 주장하고 있다. 아무리 수출을 많이 하고 세계 제일의 IT강국이며 각종 유명 대회나 행사를 주관한다 해도 삶을 가치 있게 지탱해주는 보편적 기본법규 조차 지켜내지 못한다면 그 나라는 동물세계와 별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국가의 척도와 국민의 수준은 가시적인 외양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시민의식 곧 민도로 평가되는 것이다. 한국이 넘쳐나는 자유로 계속 사회질서와 국가기강이 자리 잡지 못한다면 여전히 2등 국가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조만연 수필가·회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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