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의 질 높이려면 내가먼저 나를 인정해야 해요
▶ 가정상담소 개설이후 23년간 3만여 여성에 새삶
김광희 뉴욕가정상담소 설립자를 만나 차 한잔의 대화를 나누다보면 허허빈손으로 가정상담소를 차려 홀어머니 가정에 희망을 주고 그들의 자녀로부터 마더스 데이 댕큐 카드를 매년 받는 이유를 알게된다. 녹음 무성한 센트럴 팍 보트하우스에서 그를 만났다.
김광희 뉴욕가정상담소 설립자가 최고로 여기는 상은 개근상이다. 요즘도 1년에 두차례 봄가을로 열리는 자원봉사자 교육 첫날 “교육 15분전에 가서 시작을 기다려라. 교육 마지막날까지 개근하라”고 당부한다. 오랜시간 교육이 끝나고 마지막날에는 직접 가서 개근상을 시상한다. 개근상품으로 센트럭 팍 보트 하우스 카페에서 브런치를 먹고 팍을 산책하며 사진을 찍어 자원봉사자 웹사이트에 올려준다.
오뚜기 가정 센트럴 팍 소풍날이면 김광희는 도시락을 가져가지 않는다. 점심은 오뚜기 엄마가 싸서 가져온 것을 얻어먹는다, 대신 모든 가정의 보트 비용은 그가 낸다.
“많은 돈 쓰지 않고 봉사한다. 시간과 정성이 먼저다. 홀어머니라도 조금씩 비용을 부담하게 하여 본인도 떳떳하고, 자립심을 길러준다. 서로 주고받는 것과 삶을 즐기는 법을 배우게 한다.”김광희는 89년~93년 가정상담소 소장 4년, 93년~96년까지 이사장 3년하고는 현직에서 물러났고 지금은 뒤에서 도와준다. 지난 5월11일 맨하탄 그랜드하얏트 호텔에서 열린 뉴욕가정상담소 창립23주년 기금모금만찬에 한인 550여명이 모이는 성황을 이루었다. 1.5, 2세들이 주축이 되어 현재 윤정숙 소장, 성지연 이사장 등 직원 24명과 50여명 자원봉사자들이 가정폭력피해여성과 꿋꿋이 삶을 이어가는 여성들을 돕고 있다.
▲어려서도 남 돕기 앞장서
1944년 경기도 이천 출생인 김광희는 5녀중 둘째로 태어나 ‘불쌍한 사람만 보면 집에 데리고 와 밥을 먹이는’ 부모님 밑에서 성장했다. 은연 중 ‘누군가를 도와야 한다’는 심성으로 자라난 그는 부모님이 준 용돈을 자신을 위해 돈을 쓰지 않았다. 용돈은 길에서 만난 불쌍한 할머니에게 건네졌다. 이천중학교 3학년 시절 화학선생으로부터 퀴리 부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그는 꿈을 가지게 되었다.
“퀴리 박사 부부의 검소함, 부부애, 새로 발견한 원소이름을 폴란드 출신으로서 ‘폴로리늄’으로 정한 애국심에 감동했다. 나도 크면 퀴리 부인 같은 삶을 살고 싶다는 희망을 가졌다.”김광희는 이화여대 화학과를 졸업한 후 1969년 도미하여 인디애나 퍼듀 대학에서 생화학 석사를 받았다. 한국에서 연구소시절 만나 연애결혼한 남편 이진옥(39년생)씨는 76년 코넬의대 심장생리학 교수가 되었고 남편을 따라 뉴욕으로 온 김광희도 일자리를 구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코넬의과대학 부속병원 연구실에서 34년째 근무 중이다.
맨하탄 코넬의대 아파트에 살던 시절, 시어머니를 10년간 모시며 영어를 공부하게 하고 교회의 할아버지, 할머니에게까지 영어를 가르쳐 크리스마스에 영어 연극을 하게 한 일도 있다. “79년~89년 기독여성회에서 일하며 여성 지도자 양성 세미나를 2박 3일간 했었다. 사모들을 주로 교육했눈데 집을 떠나 하는 세미나다 보니 남편이 화를 낸 적은 있지만 상담소 고비가 있을 때마다 나의 갈 길에 대한 확신을 주었다. 내 일을 인정하며 옆에서 지켜준다. 그래서 지금도 조금씩, 야금야금 상담소 일을 하고 있다”
김광희는 교육학을 전공하지도, 여성학을 공부하지도 않았지만 훌륭한 커리어를 지닌 전문직 여성으로서 ‘매맞는 여성을 돕고싶다’는 일념 하나로 가정상담소를 시작했다. 미국직장에서 일하면서 지역 이민여성 문제에 관심을 갖고 크고 작은 여러 여성단체에 참여하면서 여성 문제에 눈을 뜬 것이다. 집에서 갖고온 책상과 노란색 전화기 한 대가 시작이었다.
▲한인여성을 위해 탄생
1989년 10월 맨하탄 115가 뉴욕한인교회 사무실 한귀퉁이에 문을 연 뉴욕가정문제상담소, 뉴욕한인교회를 다니면서 주일학교 3학년 교사를 10년 한 그에 대한 신용이 2년간 무료로 공간을 얻게 했다.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오후 6시부터 9시까지 문을 열었고 24시간 앤서링 머신을 설치, 어딜 가도, 휴가지에서도 전화상담자를 확인했다.
주중에 법원 가는 일정이 잡히면 주말에도 일했다. 회사에 하루 휴가내어 롱아일랜드, 맨하탄, 펜실베니아 코트까지 상담자와 같이 갔고 무료 변호사를 구했다.
“처음엔 남자들한테 이혼 시키려 한다고 욕 많이 먹었다. 자동차 바퀴가 칼에 찢긴 적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하는 일이 누군가에 큰힘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힘이 났다.”
1989년 싱글맘 연말파티를 교회 지하에서 열어 70여명이 모였고 1990년 제1회 자원봉사자 가정폭력교육을 시작하며 훈련된 이들이 가정폭력 피해여성들과 함께 일하기 시작했다. 오뚜기클럽(가정폭력피해자 및 싱글맘 지원그룹)이 시작된 것. 1991년 뉴욕 우먼스파운데이션 기금을 받아 정규직원과 시간제 지원이 고용되었다. 1996년 그는 이 단체의 이사로 6년간 봉사했다.
1999년 법무부 장관 자넬 르노로부터 아웃스탠딩 서비스 어워드(Outstanding Service Award)를 수상, 서비스를 더욱 확대하고자 상담소 이름을 ‘뉴욕가정문제상담소’에서 ‘뉴욕가정상담소’로 변경했다. 이후 상담소는 맨하탄 사무실을 거쳐 현재 플러싱 병원 근처에 자리잡기까지 이사를 9번이나 다니며 날로 발전을 거듭했다. 2011년 뉴욕 우먼스파운데이션은 김광희 설립자에게 평생공로상을 안겼다. 이는 지난 23년간 3만여명 이상의 여성들이 상담소 도움으로 가정폭력과 소외감, 가난을 벗어나 건강한 삶을 누린 것을 증명해준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이태영 박사로부터 영감을 받아 시작했다. 운영방식에 있어서 미국 기관을 역할 모델로 삼는 것이 장기적인 안목으로 볼 때 바람직하다는 판단을 했다.”그래서 김광희는 한국가정법률상담소의 뉴욕 지부가 아닌 독자적인 뉴욕한인여성을 위한 상담소로 시작했다. “처음 상담소를 시작할 때와 지금, 한인사회도 많은 변화가 왔다. 초창기 시절 뜻있는 한인들이 십시일반 모아준 기금은 지금도 고맙다. 상담소 일이 많이 알려지고 여성들의 의식도 많이 바뀌었다. 또 봉사자들에게 초심을 잃지 말라고 늘 당부한다. ”
김광희는 삶의 질 향상을 위해서는 ‘내가 먼저 기쁜 마음으로 나를 인정하고 당당하게, 긍정적인 에너지를 창조하는 시발점이 되자’고 강조한다.
현재 맨하탄 71가에 살며 센트럴 팍을 즐겨찾는 그는 변호사와 IT계통에서 일하는 두 아들과 손자 둘을 두었다. 요즘은 손자와 테니스 시합을 할 정도로 자주 코트에 나가서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그는 함부로 버리는 것이 없다. 두 사람이 만났다고 해서 다 마시지 않을 커피를 두잔 시키지 않는다. 아껴쓰고 나눠먹는 것이 습관이다. 2009년 여름 한국 방문때 각 처에서 벌어지고 있던 녹색운동을 보고 자극을 받은 김광희는 뉴욕으로 돌아오자마자 자신이 일하는 병원에 센트럴 랩(Central Lab) 그린팀(Green Team)을 조직하여 재활용 분리수거에 대한 녹색 운동을 일으켰다.
병원 전체의 환경운동으로 활성화된 것에 사람들은 말한다. ‘과연 김광희답다’.미국에 올 때 김광희는 세 가지 약속을 자신에게 했다. ‘첫째 부모님을 자랑스럽게 하겠다, 둘째 자랑스런 애국자가 되겠다, 셋째 하나님이 예뻐하시는 기독교인이 되겠다‘였다.‘상담자와 아이들이 자립해서 성공적인 삶을 살 때 가장 보람있고 자랑스럽다’는 김광희의 세 가지 약속은 지켜진 것으로 보인다.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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