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어 보급 열풍 20년전에 감지했지요”
1992년 8월14일 뉴저지 주정부 청사에서 열린 ‘한국의 날’ 선포식에서 이영빈(오른쪽)이 답사를 하고 있다. 중앙이 짐 플로리오 주지사.
총연회장 출마시 공약...모금운동 등 통해 임기중에 실천
1992년 한국어프로그램 시작 2009년 교사양성 석사과정도 설치
주류인사들과 교류.지역한인사회 유대 이끈 뉴저지 터줏대감
럿거스대의 한국어 과정 설치와 관련해 한가지 특기할 사항은 미 동부지역의 미국대학에 한국어 과정이 처음 설치된 것은 1992년 가을학기에 뉴저지 주립대학인 럿거스 대학이 에이시언 스터디스 산하에 한국어 프로그램을 시작하면서 비롯됐다. 이보다 5년 앞서 뉴욕주립대 스토니브룩 캠퍼스에 한국학 프로그램이 먼저 설치되기는 했지만 스토니브룩은 퇴계 및 원효, 종교사상 등 한국학 강좌를 주로 했던 프로그램이었고 언어 과정으로서의 한국어 프로그램은 럿거스대가 먼저 테이프를 끊은 셈이다.
당시 한인사회의 모금을 통해 이 프로그램이 실현됐다는 점이다. 뉴저지한인회의 전신인 당시 뉴저지한인총연합회(회장 이영빈.사진)가 총대를 메고 모금운동을 전개한 결과 학교 재단측이 제시한 매칭펀드를 기일 내에 납부함으로서 프로그램이 시작됐고 그후 3년간 약정액을 차질없이 재단 측에 전달해 영구설치가 정착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당시 뉴저지총연(이하 총연) 회장에 출마하면서 이영빈은 럿거스대 한국학과 설치를 공약으로 내세웠으며 임기 중 이를 실천에 옮긴 회장으로 기록된다.
올해로 창설 20주년을 맞는 럿거스대 한국어 과정은 당초 목표대로 독립된 한국학과로 승격되지는 못했으나 그간 많은 발전 속에 한국어 초,중,고급반을 비롯, 한국문화, 한국역사, 종교등 전반에 걸친 연구 및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또한 2009년부터 한국어 교사 양성 프로그램 석사과정을 처음으로 설치해 수료생을 배출함으로서 그들이 현재 뉴저지내 각 고교에서 한국어 교사로 활동 중이다.
럿거스대 한국학과 창설에 명예를 걸었던 이영빈은 1991년 총연 15대 회장 취임과 동시에 첫 이사회에서 럿거스대 한국학과 후원회를 산하기구로 발족시켰다. 후원회장에 유인석, 상임위원에 지성철 럿거스대 약학과 교수, 오다윗 신부 등이 선출되었고 뉴저지 내 5개 지역한인회장들이 자동직 위원으로 위촉되면서 모금활동이 본격화 되었다. 후원회와 학교당국이 수차례 회동을 통해 마련된 골격은 매년 3만달러의 강좌 운영비 가운데 후원회가 절반인 1만5천달러를 3년간 부담하고 나머지 기금은 학교재단이 출연하는 방식으로 한국어 과정을 설치키로 합의했다.
모금운동을 진두지휘한 이회장은 첫 사업으로 안트리오 초청 자선음악회, 모금 골프대회 등을 성황으로 이끌어 첫해 강좌에 필요한 매칭펀드 1만5천달러가 어렵지 않게 마련되었다. 행사 수익금 외에 정영인, 심재길, 최선근, 조용래, 이건용 등 독지가들의 개인 기부도 큰 몫을 했다. 7월22일에는 모금액을 재단 측에 전달함으로서 계획대로 당해 학년도인 1992년 9월7일 역사적인 한국어 강좌가 시작됐다.
계속적인 모금활동 끝에 후원회는 부담금 전액을 3년간 완불함으로서 럿거스대 한국어 과정은 영구 정착되었다. 이에대해 이영빈은 그 공을 뉴저지 한인사회로 돌렸다. “당시 동포사회에 우리의 언어를 미국에 보급하자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고 럿거스대 아시안 스터디스의 책임자 칭 투교수 등 내부 협력이 있었다”고 말했다. 요즘 미국의 각 학교에 한국어 보급 열풍이 불고있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미 20년전에 이를 간파한 선견지명이었다고 평가할수 있을 것이다.
정신과 및 신경내과 전문의로서 미국사회에 비교적 일찍 정착한 이영빈은 자신의 입장을 활용해 한인사회를 미 주류사회로 진입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인 봉사자의 한사람으로 분류된다. 특히 뉴저지총연회장 임기 중 짐 플로리오 뉴저지 주지사와의 개인적인 친분과 총연 차원의 노력이 주효하여 주정부 행사에 많은 동포들이 참여하는 한편 동포사회 행사에도 주정부 관리들이 참석하는 교류가 분명히 있었다.
뉴저지주 소수민족 자문위원에 한인(임영진 전 한인회장)이 위촉되고 주지사와의 간담회도 열렸다. 주정부 청사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 주간 선포식에 이회장이 연사로 참석하여 한인사회의 위상도 높였다. 그해 8월15일 광복절에는 플로리오 주지사가 ‘한국의 날’을 선포하는 기념식도 가졌다. 무엇보다도 93년 2월 주지사가 메드포드 이회장 자택을 공식 방문, 한인사회 유지들과 만남의 자리를 가진 것은 때마침 선거가 치러지는 해였다는 특수성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뉴저지한인회 사상 초유의 일로 기록된다.
체리힐 일대의 남부뉴저지 한인사회 리더로 출발했던 그는 당시 활성화 되어있던 뉴저지내 5개 지역한인회와 유대를 갖는 작업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당시 버겐카운티를 중심으로 한 북부뉴저지한인회를 비롯, 뉴브런스윅 중심의 중부한인회, 먼머스 카운티 중심의 중앙한인회, 아틀랜틱한인회 등 지역행사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가 하면 각지역 상인번영회와 직능단체, 교회협의회와도 협조 분위기를 조성한 회장으로 꼽힌다. 이런 여러가지 공적들이 참작되어 그는 지난 2008년 미국내 이민자에게 최고의 영예로 주어지는 ‘엘리스 아일랜드상’을 수상했다.
연세대 의대를 졸업하고 군의관으로 제대한 후 1964년 수련의로 미국땅을 밟은 이영빈은 입국 초기 워싱턴DC의 시블리 메모리얼 병원에서 인턴십 1년을 마치고 필라델피아로 옮겨가 신경내과 수련의 3년, 정신과 수련의 2년을 뉴저지에서 마쳤다. 전문의로서 임상교수 등 40여년에 걸친 커리어를 대부분 뉴저지에서 보낸 그는 한때 100여 환자에 의사, 간호사, 일반직원 등 100여 명을 거느린 주립병원 부원장으로 봉직하면서 인사권을 지닌 행정요직도 거쳤다.
1997년 뉴왁 소재 뉴저지의과대학 조교수를 끝으로 현직에선 은퇴했지만 신경정신과 환자들의 오피스 진료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올해부터는 쇠약해진 몸도 추스릴 겸 부인 이유경과 함께 반 은퇴생활에 접어들고 있다.
“선착 이민자로서 뒤에 들어온 이민자들을 이끌어 주고 보살핀다는 것은 돈과 시간이 투자되는 힘든 역할이지만 이들을 외면하지 않고 손을 내미는 것이 바로 봉사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행복해 지려면 남부터 행복하게 해야 한다는 말처럼 한인회를 통해 봉사를 시작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도움받은 사람들로 부터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격려의 카드를 받을 때 보람을 느낍니다. 그런데서 사는 보람을 찾습니다.” 그는 슬하에 변호사 활동을 하고있는 에드워드, 제이슨 등 2남과 수잔, 엘렌, 자넷 등 3녀를 두었다.
조종무<국사편찬위 해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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