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친구들 몇 집이 3살에서 초등학교 1, 2학년짜리 애들을 데리고 냇가로 나왔다. 서울에서 한시간 정도 운전하고 나온 조용하고 깨끗한, 물길도 세지 않아 물가에 돗자리 깔고 누워 애들과 딩굴거리기에 좋은 곳이다. 파아란 하늘에 뭉게뭉게 떠 있는 몇 조각의 흰구름, 애들은 물장구도 치고, 바닥에 깔린 돌멩이들을 이리저리 옮겨도 보며 깔깔거린다. 물고기들을 잡아 튀기고, 매운탕 끓여준다는 남편들의 말을 애저녁에 믿지 않고 준비해온 김밥을 먹으며 애들과 엄마들은 주어진 하루의 호강을 만끽하고 있었다.
갑자기 주위가 어수선해지며 가족동반하고 나왔던 아빠들이 서둘러 짐정리하고 돌아갈 준비를 한다. 육군부대가 가까와 군인가족들이 많이 나와 있었나 보다. 비상! 군인들은 군부대로 집합명령. 라디오를 켜니 이북에서 비행기가 남한으로 내려왔단다. 일요일이라 오랫만에 나갔던 물놀이에서 서둘러 우리도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오니, 해군중령인 남편도 비상. 몇 일간 얼굴도 볼 수 없었던 군인남편의 비상근무, 전화연락도 안 되는 군인남편을 기다리며 초조했던 30여년 전의 한국에서의 이야기다.
1974년, 아버진 늘 이북의 움직임에 불안해 하셨다. 그때는 북한에서 넘어온 간첩들이 왜 그렇게도 많았었던지 몰라. 거의 매일 간첩에 관한 기사가 신문에 나왔으니까. 지금은 북한간첩들이 남한에서 할일들이 없어졌나봐. 모든 것 다 놔두고 떠나야 하는 미국으로의 이민을 결정하신 것도 북한으로부터의 불안감이 많이 작용했었을테니까… 6.25전쟁을 겪어본 세대는 그 처참함을 알기에 가족을 안전한 곳이라 여겼던 미국으로 향했었겠지.
북한은 남한을 쳐 내려오려와 우리의 삶을 망가뜨리려 한다고 늘 생각했었다. 세월이 흘러 북한에 대한 남한 사람들의 시선이 많이 달라졌다고 하나 반공교육을 받고 자란 나는 북한의 본심을 이해할 수가 없다. 핵폭탄 발사보다는 굶어죽는 애들을 보살펴야지… 이제는 북한의 핵폭탄 발사거리가 미국 본토까지라니, 돌아가신 아버지가 아셨음 “제네들, 정말 왜 저래” 하시며 우리를 어디로 데리고 가시려고 하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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