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 1호 국회의원 조명철
박근혜 정부의 통일, 대북정책의 핵심 브레인 가운데 하나로 여겨지는 조명철 새누리당 의원이 워싱턴에서 24일 워싱턴 평통 관계자들과 미주 한인들을 만났다. 조 의원의 논지는 간단했다. “대북 정책이 모두 실패로 드러났으니 이제 철저히 과거를 반성해야 한다. 여기에는 진보든 보수든 상관없다.” 북한 핵 문제와 관련 가장 원치 않는 방향으로 모든 결과가 나왔으니 남북 문제를 새롭게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주장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함께 일하자고 불렀을 때 자신은 전혀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해서 정계에 진출했다는 그는 탈북자 출신 1호 국회의원으로서 탈북자들이 갖고 있는 남모르는 아픔에 대해서도 소상히 얘기했다. 질문과 답변 형식으로 그의 생각을 정리했다.
-미주 한인들을 만나는 소감은.
연구소 초청 등으로 몇 번 왔는데 올 때마다 미국에서, 동포들에게서 배우는 것들이 많다. 새롭게 얻는 아이디어들을 많이 참고하려고 노력한다.
-지금까지의 남북 관계 및 한국 정부의 대북 정책을 평가한다면.
내가 서울에 온 것이 1994년이니까 20년이 됐다. 그러나 남북 격차는 좁아지지 않고 더 넓어졌다. 모든 피하고 싶은 상황은 현실이 돼버렸다. 1994년 제네바 핵 합의가 이뤄지고 김일성이 사망했지만 반대로 북한은 핵 위협을 공공연히 하고 있다. 사정거리가 500 킬로미터에 못미치던 북한 미사일은 1만5,000 킬로미터까지 이르는 수준으로 개발됐다. 북한을 개혁, 개방으로 유도하려고 애썼지만 더 폐쇄됐고 군사화 됐다.
하지만 누구도 나서서 책임을 지겠다고 하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 북한은 전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가 돼 주민들이 신음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과거 정책을 계속 답습하며 갑론을박해야 하는가? 진짜 미래를 위한 액션 플랜을 세워야 할 때다. 그러나 희망찬 통일을 얘기하기에는 현실이 너무 어렵다.
- 조 의원의 이런 주장들이 당 내에서 받아들여지나.
아직은 내가 중진이 아니지만 당연히 의견이 수렴된다. 콘센서스가 모아지고 있다. 남북 대화에서 핵 문제가 절대 뒤로 밀려서는 안되고 반대로 핵이 없어져야 진짜 대화가 시작될 수 있는 것이다. 대화 재개에 앞서 원칙과 신뢰가 쌓여야 한다. 인도주의적 경제 지원 및 북한 재건 논의는 그 다음 문제다.
-지금 탈북자들의 현황은 어떤가?
이들을 구출하는데 도움을 주는 브로커들이 적잖히 있었으나 중국 정부가 강력히 단속하는 바람에 작년부터 아주 어려워졌다. 조선족이든 중국인이든, 한국 선교사든 탈북자 구출에 나섰던 사람들이 검거되거나 큰 벌금을 물으니 감히 나서서 일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탈북자 북송도 도가 지나칠 정도다. 탈북 숫자가 60% 이상 감소했다. 한국은 이들을 수용할 시설을 크게 지었는데 갑자기 줄어들어 텅텅 비었다.
약간 긍정적인 변화도 있다. 북한은 연좌제를 세계에서 가장 강력히 적용하는 나라였는데 최근 탈북자가 많아져서 약간 느슨해졌다. 관련된 가족이 수십 만이 될텐데 이들을 모두 처벌할 수는 없게 된 것이다.
-탈북해 자유세계에 오는 방법은 달라진 게 있나?
중국 내 여러 나라 대사관에 들어가 유엔 고등판무관과 인터뷰를 하고 망명지를 택하는 방식은 힘들어졌다. 중국 공안당국의 경비가 삼엄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은 외국인을 위한 학교인 국제학교에 많이 들어간다. 제3국 가운데 동남아의 T 국이 다행히 유일하게 탈북자들을 한국으로 보내 그쪽 루트를 많이 이용한다고 들었다. 고마운 나라다. 그러나 브로커로 일하는 분들이나 선교사들이 자꾸 탈북 루트를 공개해 안타깝다.
-한국 정부나 미국의 탈북자 구출 정책은 어떻게 평가하나?
한국은 이들이 탈출하면 바로 대한민국 국민의 법적 지위를 제공하나 중국이 인정 안하니 문제다. 난민 지위를 바로 받을 수 있도록 캠페인을 벌여야 한다. 미국은 감사하게도 북한인권법, 탈북고아입양법 등이 통과됐는데 한국은 그렇지 못해 부끄럽다.
탈북자 지원 정책도 새롭게 검토돼야 한다. 우선 탈북자들의 신분이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특정 지역 출신이 많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전 지역, 전 계층에서 탈북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 형평이라는 이유 때문에 무조건 똑같이 지원을 하니 문제다. 맞춤형이 돼야 한다. 또 정부 책임으로만 생각할 게 아니고 기업과 사회, 개인이 함께 나서서 이들을 도와야 한다. 극심한 경제난을 딛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죽는다면 말이 되는가? 탈북자들의 실업률은 일반의 3배이고 자살률 역시 몇 배가 넘는다. 한국이 전세계서 자살률 1위라는데 탈북자들은 그보다 많다. 기업들이 이들을 훈련시켜서 써먹어야 한다. 취직 못하면 이들은 죽음이다. 주말인데도 갈 곳 없고 오라는데 없는 이들의 고통을 아는가? 고향, 가족 생각으로 우울증에 걸리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사회의 정당한 구성원이 되도록 도와야 하지 않겠나?
-통일 항아리 등 남북 통일을 대비해 기금을 모으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보다 효과적인 통일 준비는 어떻게 해야 하나?
안된 얘기지만 국민들이 성금을 모으고 정부나 기업이 기금을 비축하는 것은 가장 비효율적인 방법이다. 국가 경제의 재정 건전성을 튼튼하게 하면 된다. 미래를 대비한 저축은 지금 맞지 않는다. 모아진 기금을 굴리는 것도 그렇고. 수익이 생겨도 문제, 안 생겨도 문제다.
-새누리당 국회의원이 된 이유는 뭔가?
박 대통령의 요청을 받고 고민 많이 했다. 북한에서느 김일성종합대 경제학부 교수를 지냈고 한국에 와 대외경제정책 연구원, 통일교육원장 등을 지냈지만 정치는 생소한 분야다. 우선 능력이 안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도움이 된다면 해야 한다고 생각해 결정했다.
-탈북의 동기는 무엇이었나?
탈북은 1994년에 했지만 그 전에 평양에 있을 때 삐라를 본 적이 있다. ‘북한은 외화 없이는 냉면도 먹을 수 없는 나라’라는 문구를 보자 머리를 방망이로 맞은 듯 했다. 사실이었지만 그것을 아무도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상황,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없는 사회의 아픔을 뼈저리게 느낀 것이다.
그러다 중국 베이징에 교환교수로 가게 됐다. 1994년에 김일성이 죽었다. 북한 대사관이 울음바다가 되는 것을 보면서, 북한의 실상이 드러나면서 극한 분노가 치밀었다. 탈출을 결심했고 홍콩행 비행기를 탔다. 당시 부친은 건설부장관이었고 아내와 자녀도 북한에 있었다. 미치지 않으면 못하는 짓이었다.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었지만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넌 후였다. <이병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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