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마치 고개에 얽힌 6*25전쟁속 현리 전투
▶ 앉은 이가 당시 3군단장 유재흥 소장
퇴각로 막혀 군단무너지며 2만명이 100명에게 완패“
작은 소홀함이 수습불가 큰사건 된다” 교훈얻어
6.25 남침전쟁이 한참이던 1951년 5월 어느날, 9사단 포병 관측 장교이던 이현덕 소위는 며칠 동안 계속해서 야간 이동을 하는 적의 동향을 주시하며 아군의 포격을 유도하고 있었는데 한 날은 연막탄으로 아군의 시야를 가리고 강을 건너는 대규모 중공군 병력을 발견하였다. 중공군의 2차 춘계 대공세가 시작된 것이다. 중공군은 이 공세에서 총 27개 사단으로 전선을 압박하면서 그 주공(主攻)을 강원도 인제군 현리에 포진한 국군 3군단(3사단과 9사단)에 두고 조공(助攻)을 경기도 가평에 두었다. 이때 이현덕 소위는 9사단이 소양강을 따라 구축한 진지에서 적을 관측하기 좋은 가장 근접한 위치인 보병의 분대 참호까지 가서 아군의 포사격을 유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현덕 소위가 유도하는 대로 9사단의 포가 소양강을 건너는 중공군 위로 작열을 했고, 그것도 모자라서 후방에 있던 미군의 중장거리 포까지 동원하여 쏘아대었다. 아군의 포의 화력도 대단한 것이였지만 중공군의 인해전술 (人海戰術) 또한 가공할만 한 것이였다. 중공군은 아군의 관측을 피해서 주로 야간에 공격하였는데 일파(一波)가 쓰러지면 다음 2파가 밀려들고, 2파가 쓰러지면 다음 3파가 덥치고, 적군의 시체는 아군의 시야를 가릴 정도로 싸이고 아군은 총구가 닳고 포신이 벌겋게 달아 오르듯 쏘아대는데도 중공군은 파도처럼 계속 밀려만 오는 것이었다.
당시 3군단의 보급로는 오마치 고개라는 작은 통로 하나 뿐이였는데 이 지역이 미 10군단의에 배속된 국군 7사단의 작전 지역이였다. 그런데 군단장 유재흥 소장은 미 1군단과 전혀 협조 없이 그냥1개 대대를 이 고개에 보냈다가 미 10군단장 알몬드 소장의 거센 항의를 받고 철수시켰다. 그동안 일부 중공군은 이 산악 지형을 30 킬로나 야간에 통과하여서 오마치 고개를 점령한 것이다. 군단의 우측에 포진되었던 국군7사단은 중공군에게 밀려 철수하는 상황에서 자기들 철수를 인접 우군인 국군9사단과 3사단의 3군단에 알리지도 않았다. 물론 오마치 고개가 적에 점령되었다는 것도 알릴 겨를이 없었다.
옆구리가 빈것을 뒤늦게 안 3군단도 서둘어 철수를 하였는데 이들 철수 차량은 중공군이 점령하고 있는 오마치 고개를 통하는 협곡 좁은 길에서 모두 막히고 말았다. 군단 지휘부는 그 때까지도 오마치 고개가 적 수중에 넘어간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오마치로 가는 협곡 좁은 길에서 군단의 모든 장비와 차량이 일렬종대로 늘어선채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데 “포위되었다”는 루머가 퍼지면서 온 군단은 패닉 상태가 되었다. 먼저 군단장이 경비행기를 타고 탈출을 하고 사단장 연대장등 지휘관과 고위 장교들이 계급장을 떼고 후퇴 대열에 합류했다. 그러니 일반 병은 말할 것도 없다. 문제는 전투에서 패배한 것이 아니라 후방퇴로가 차단되었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순식간에 군단이 무너저 내린 것이다. 오마치 고개를 점령한 중공군 병력은 1 개 중대 100명, 퇴로를 차단 당한 상태에서 패닉에 빠진 국군3군단 총 병력은 2만2천명.
이현덕 소위는 이후 적군이 점령한 능선과 계곡을 피해 가파른 산중턱을 탈출로로 삼아 밤낮을 걸으며 곳곳에 탈진과 굶주림으로 죽은 아군의 시체가 널려진 참상을 목격했다. 그냥 방치된 군단의 차량, 대포 등의 각종 무기, 산더미같은 탄약과 보급품. 이 전투에서 이렇게 3군단은 전투 한번 시원하게 못하고 장비와 병력 대부분을 잃었다.
한국전 전사(戰史)에는 중공군 2차 춘계 대공세에서 잘 싸워준 아군의 여러 기록이 있다. 여단이 전멸되는 상황에 이르도록 방어진을 지켜서 아군이 재 편성할 시간을 벌어준 영연방 제 27여단, 상황이 다급하자 아군 적군 상관없이 무차별 (陣內射擊) 포격을 하도록까지 해서 벙커 고지의 진지를 사수한 미 2사단 (미 2사단은 그렇게 해서 현리에서 뚫린 돌출부가 서부로 확대되는 것을 막았다). 용문산 전투에서 중공군 3개 사단을 막아서 아군 반격의 발판을 마련한 국군 6사단, 등 열거하면 여럿이다.
오직 3군단의 현리 전투가 한국전쟁사에서 가장 어이없고 수치스러운 패전으로 기록될 뿐이다. 각 전술학 교재에서 지적하는대로 현리 전투는 가장 상식적인 것을 지극히 소홀이 한 가장 비상식적인 전투였다. 보급로 확보와 우군 인접부대와의 협조는 전술학의 기초이고 상식인데 이것을 3군단 지휘부는 간과한 것이다. 대전 중학교 5학년 때 학도병으로 지원했다가 전투중 육군 종합2기로 임관했던 포병 장교 이현덕은 군복무중 두차례나 미국 유학을 하고1965년 중령으로 예편하였다. 이웃 아이들에게 인기좋은 할아버지,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맘좋은 사진사 아저씨 이현덕은 얼마전 8순을 지내고 지금 회고록을 준비하고 있다. “하찮은 작은 소홀함이 수습할 수 없는 큰 사건으로 확대될 수 있는 것” 이것은 다만 이현덕 翁만 얻은 인생 교훈이 아닐 것이다.
<정리 김정수 본보 객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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