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캐티 버틀러, 부모님 관련 체험 책으로 펴내
▶ 뇌졸중·치매 아버지‘심박동기’달고 죽음같은 삶… 수년 간 간병 어머니“장치 꺼달라”요구 병원서 거절 “진정한 가족사랑은 무얼까”복잡 미묘한 감정 담아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결정 가운데 하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것이다. 한평생 가족을 위해 헌신한 아버지를, 남편 잘못 만난 죄로 지지리 고생만 해온 아내를, 눈에 넣어도 아플 것 같지 않은 아이를 홀로 떠나보내는 것만큼 억장 무너지는 경험은 없다. 인간의 삶은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로 규정된다. 그들과 굽이굽이 얽힌 관계가 바로 내 삶의 내용이다. 임종의 자리에 늘 회한이 따르는 것은 다시 채울 수 없는 삶의 한 부분이 뭉텅 떨어져 나가기 때문이다.
캐티 버틀러는 5년 전 아버지와 길고 힘든 작별을 했다. 제프리 버틀러는 근사한 아빠였고, 멋진 남편이었다. 대학 교수로 활동하다 은퇴한 제프리는 79세 되던 해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의사들은 그가 심박동기(페이스메이커: pacemaker)를 필요로 한다고 말했다. 심박동기, 혹은 심박조율기는 맥박이 너무 느려서 발생하는 서맥성 부정맥 치료에 사용되는 조그만 금속성 기구로 간단한 수술을 통해 어깨 피부 밑에 삽입하도록 되어 있다.
제프리의 아내인 발레리는 물론 캐티를 비롯한 자녀들은 두말없이 심박동기 사용에 동의했다.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수술 후 제프리의 병세는 차도를 보이는 듯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그의 건강은 갑작스레 급경사가 진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거기에 복병이 숨어 있었다. 치매였다. 치매는 빠른 속도로 그의 인지력을 흩뜨려 놓았다. 평소 말끔하게 정돈되어 있던 그의 기억은 엎질러진 쓰레기통처럼 뒤죽박죽이 되었다.
발레리는 남편의 병구완에 ‘올인’했다. 그림도 포기하고, 요가 클래스도 접었다. 남편의 병세가 악화되자 친구와의 접촉마저 끊어버렸다.
그녀는 완강히 주변의 도움을 물리쳤다. 전문 간병인을 구하라는 자식들의 애원마저 묵살했다. 그렇게 온 힘을 다해 남편의 간호에 매달렸지만, 발레리에게 돌아온 것은 고혈압과 잠 못 이루는 밤, 그리고 우울증이었다. 완전한 타인이 되어버린 남편 옆에서 발레리도 화석이 되어가고 있었다.
남편을 사랑하지만, 그는 남편이 아니었다.
죽을힘을 다해 몇 년을 버텨낸 발레리는 어느 날 코네티컷의 집에 들른 딸 캐티에게 “아버지의 심박동기를 제거하고 싶다”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제프리의 몸과 마음은 이미 죽었는데 심박동기의 조율을 받는 심장이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고 했다. 주변인에게 고통을 주는 것 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죽음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다는 얘기였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언론인으로 일하던 캐티는 아빠의 모습에서 엄마가 느끼는 절박한 마음을 읽어낼 수 있었다.
속히 떠나고 싶기는 제프리도 마찬가지였다.
아주 잠깐씩 제정신이 돌아올 때마다 제프리는 “내가 너무 오래 산다”고 한탄했다. 이제 그만 편히 쉬고 싶다고 했다. 그에겐 세상에 대한 미련 따위는 없었다.
캐티는 이제 자신이 총대를 메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늙은 어머니는 너무 지쳐 있었다. 남편의 심박동기 제거는 84세의 노파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캐티는 병원을 찾아가 아버지의 몸에 삽입된 심박동기를 정지시켜 달라고 요구했지만 의사들은 딱 잘라 거절했다.
캐티는 마치 따귀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심박동기 정지 요청이 아버지의 목숨을 끊어달라는 청부살인 요구처럼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무의미하고 고통스런 인위적 생명연장에 ‘이제 그만’이라고 말하는 용기가 패륜으로 매도되는 것 같아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녀는 단 한 순간도 아버지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의사와 상관없이 억지로 심장을 뛰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이기적인 생각이라고 믿었다.
페이스메이커는 생명연장을 위해 고안된 기기이고, 제프리의 목숨 줄을 붙들어 매는데 기여했다. 제 몫을 충분히 해낸 셈이다.
제프리의 상태로 보아 용도폐기의 시점에 도달했지만 의사들은 심박동기 작동중지는 법적으로 금지된 안락사에 해당하며, 따라서 캐티의 요구에 응하는 것은 살인방조라고 믿는 듯했다.
사실 페이스메이커의 작동을 중지시키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수술도 필요 없었다. 그러나 의사들과 병원 측은 제프리 가족의 거듭된 애원에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환자 가족과 병원 측이 팽팽히 맞선 상태에서 시간은 흘렀고 식물인간이 되어버린 제프리는 2008년 호스피스 병동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가 심장박동기를 끄지 못한 채 타계한 뒤 미 심장리듬협회와 미 심장협회는 2010년 인체 삽입형 심장기기를 비롯, 원치 않는 생명연장 치료법을 거부할 수 있는 환자 본인이나 법적 대리인의 권리를 강화한 새로운 지침을 내놓았다. 심장관련 협회들이 내놓은 지침은 심박동기의 작동을 중지하는 것은 안락사나 의료인 조력 자살이 아니라고 분명히 밝혀두었다.
그러나 윤리적인 이유로 박동기를 중지시키는데 거부감을 느끼는 의사라면 환자나 대리인의 요구를 들어줄 다른 동료를 소개시켜 줄 것을 권하고 있다.
제프리가 세상을 하직하기 무섭게 발레리가 무너졌다. 남편을 보낸 후 병상에 누운 발레리는 그 이듬해인 2009년 눈을 감았다.
남편에 데인 탓인지 발레리는 생명연장을 위한 모든 치료를 거부했다. 심혈관 확장수술도 마다했고 의사가 권하는 심장수술도 끝내 받지 않았다.
3년 전 캐티 가족의 사연이 뉴욕타임스 매거진을 통해 소개되자 전국적인 반향이 일어났다. 여론은 발레리 모녀에게 동정적이었다.
여기에 자극받은 캐티는 그녀 가족이 겪은 시련과 경험을 책으로 써내기로 결심했다.
그녀의 노력은 결실을 맺었다. 시간 속에 묻혀 사라질 뻔한 버틀러가의 드라마는 ‘천국의 문 노크하기: 사망에 이르는 더 나은 경로’(Knocking on Heaven’s Door: The Path to a Betterr Way of Death)라는 제목이 붙은 한 권의 책으로 정리됐다.
이 책을 통해 캐티는 그녀가 체험한 병원을 독자들에게 자세히 설명한다. 많은 지면을 심박동기에 할애한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그 외에 심장병, 중환자실, 의료 판촉과 컨베이어벨트가 되어버린 미국의 의료 시스템에 관한 성찰도 담겨 있다. 환자와 가족들이 유용하게 참고할 수 있는 책과 웹사이트, 단체 목록도 부록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그녀의 책은 사랑하는 아버지의 심박동기 제거를 둘러싼 복잡 미묘한 감정의 파장을 설득력 있게 묘사하고 있다.
생명연장 치료법에 신중해야 한다는 그녀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미국의 문화는 무엇인가 더 많이 주고, 더 많이 해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넘침은 부족함만 못하다.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는 더해 주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이제 충분하다’고 말해주는 것이 더 큰 사랑일 수 있다.”
<뉴욕타임스 특약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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