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거부할 수 없지만, 수용하기 싫은 ‘세대교체’
세대교체는 부모자식 간의 역할 반전을 의미한다. 이제까지 내가 돌보아온 ‘아이’에게 이제는 나를 의탁해야 한다. 거부할 수 없는 순리지만, 선선히 수용하기가 쉽지 않다.
삶은 끊임없이 순환한다. 태어나서, 성장하고, 가정을 이루고, 새 가지를 낸 다음 시들어간다. 시작은 끝을 향해 움직이고, 종착점은 새로운 출발점과 겹쳐진다. 그 과정에서 마치 릴레이 경주처럼 주자 교체가 이뤄진다. 아비는 아들에게 바통을 넘기고, 자식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경주를 이어간다.
인간의 여정에 세대교체는 필연적이다. 인생은 유한하고, 생로병사의 과정은 피할 수 없다. 상록수처럼 늘 푸른 나무가 되고 싶겠지만, 그건 그저 ‘희망사항’일 뿐이다. 노쇠와 죽음은 절대 부도를 내지 않는 보증수표다.
겁쟁이들은 나이가 드는 것을 두려워한다. 자식에게 안방을 내어주고 ‘뒷방 늙은이’로 물러앉는 것이 어쩐지 초라하고 서글프게 느껴진다. 마치 내 삶의 운전대를 넘겨주기라도 한 것처럼 불안스럽고, 허전해진다.
세대교체는 부모자식 간의 역할 반전을 의미한다. 이제까지 내가 돌보아온 ‘아이’에게 이제는 나를 의탁해야 한다. 거부할 수 없는 순리지만, 선선히 수용하기가 쉽지 않다.
나이든 부모 봉양은 거의 대부분 장성한 자녀들의 몫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성인이 된 자녀는 부모의 신체적, 감정적 욕구를 모두 충족시킬 만한 위치에 있지 않다. 보살핌을 받는 처지에서 주는 입장으로의 전환은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아직 부모를 모실 준비가 안 된 2세들을 혼란스럽고, 겁먹게 만든다.
그렇지만 언제까지 주저할 수는 없다.
릴레이 경주에서 주자 간의 바통터치 존은 거리가 제한되어 있다. 일정한 거리 안에서 기존 주자와 후속 주자 사이에 바통교환이 이뤄지지 않으면 실격판정을 받게 된다.
예로부터 ‘충’과 ‘효’라는 덕목의 중요성을 유난히 강조해 온 중국이 최근 ‘노인 권익보호법’을 제정한 이유는 세대교체에 따른 역할반전이 매끄럽게 이행되지 않고 있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이 법은 장성한 자녀를 향해 나이든 부모의 정신적, 물리적 필요성을 충족시켜 주라고 명령한다. 해당 법조문 가운데에는 부모를 자주 찾아뵈어야 한다는 조항도 포함되어 있다.
부모 봉양의 세세한 의무를 법으로 정한 셈이다. 노인 권익보호법을 어기면 어김없이 벌금폭탄을 맞게 되고, 위반 정도가 심각하다고 판단되면 실형을 살게 된다.
그런가 하면 구소련 위성국들 중 일부는 노부모에게 재정지원을 제공하지 않는 자녀를 제소할 권리를 부여했다.
벌써 오래 전에 사문화되기는 했지만 미국의 여러 주도 이와 비슷한 법을 제정했다. 아직 폐기하지 않았으니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집행이 가능하다.
관련법이 있건, 없건 나이든 부모를 봉양해야 할 도덕적 책무를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문제는 생각과 현실 사이의 간격이다. 제아무리 부모를 모시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아도 현실적 여건이 여의치 않으면 실천이 따르기 힘들다.
여력이 부족하면 ‘선택과 집중’의 전략이 필요하다. 우선순위를 매겨 선순위 대상에 힘을 집중해야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이미 가정을 이룬 장성한 자녀는 챙겨야 할 자신의 가족이 있고, 무시할 수 없는 개인적 욕구와 반드시 달성하고 싶은 삶의 목표가 있다. 이러다보니 늙으신 부모가 끼어들 자리가 마땅치 않다. 우선순위에서 앞자리를 배정 받기가 이외로 어렵다.
상황이 좋지 않을수록 자식과 부모 모두의 부담이 커지게 마련이다. 자식은 자식대로, 부모는 부모대로 부담스럽고 눈치가 보인다.
반면 자식을 위해 한 평생을 헌납했다고 자부하는 부모 가운데 일부는 종종 채권 추심원 같은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우리가 너에게 이만큼 투자했으니 이제는 네가 갚아야 할 차례”라는 식이다. 이른바 ‘보험청구형’ 부모다. 지나치게 비판적이거나 감사할 줄 모르는 부모도 적지 않다.
자식의 반응도 삐딱하다. 마음 바탕에 깔려 있던 고마움이 분노와 낙담과 거부감으로 변한 탓이다.
평소 자녀에게 소홀했거나, 험하게 굴었다든지 감정적으로 소원했던 자기 중심적 부모는 그들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할 때 문전박대를 당하기 십상이다. 뿌린 대로 거두는 원리는 ‘자식 농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장성한 형제가 없는 것도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부모 봉양의 짐을 나눠질 수 없기 때문이다. 무거운 짐수레를 끌고 가파른 비탈길을 올라가려면 한 사람만의 힘으로는 부족하다. 앞에서 끌 때 뒤에서 밀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평균수명 연장 추세 역시 문제를 더욱 꼬이게 만든다. 인간의 평균수명은 불과 몇 년 사이에 큰 폭으로 늘어났다. 이제 60대 초반은 노인 축에 끼지 못한다.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은 하늘이 주는 선물이다. 그러나 수명만 엿가락처럼 늘어났을 뿐 삶의 질이 개선되지 않았다면 축복이 아닌 저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실제로 노인들 대부분은 한두 가지 만성 질병으로 골골하면서 연장된 삶을 살아간다. 자식의 노후 보살핌이 더욱 절실한 이유다.
코네티컷 다렌 소재 라이프 솔류션 센터의 모드 퍼셀 사무총장은 노쇠해진 부모에 대해 자녀가 느끼는 착잡한 감정을 두려움과 슬픔, 분노와 죄책감으로 정리했다.
이제까지 보살핌을 받아온 내가 이제는 부모를 책임져야 한다는 깨달음은 곧바로 두려움으로 연결된다.
서글픈 감정은 홀로서기 능력을 상실한 부모의 모습에서 우러난다. 한때 혈기왕성했던 아버지의 노쇠한 모습은 안타깝고 눈물겹다.
그렇지만 부모 봉양이 자신의 삶과 충돌을 일으킬 때 분노와 좌절의 감정이 증폭되면서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낸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옛말은 장구한 검증을 거친 경험칙이다. 이처럼 혼재된 감정에 휘둘리다 보면 죄책감의 수위가 높아진다.
퍼셀은 이런 감정이 드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이라며 여기에 저항하려 들지 말라고 권한다.
퍼셀의 충고는 야박스러울 정도로 현실적이다. 그녀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책임을 지려들지 말라고 누누이 강조한다.
샌디에고에서 활동하는 임상 심리치료사 켄 드럭은 부모 봉양은 죄책감이나 의무감이 아닌 사랑의 행위가 되어야 한다며 “자신의 한계 내에서 주는 분수에 맞는 사랑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감정적 탈진을 피하려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을 냉정히 평가한 후 스스로의 한계를 정하고, 이에 대해 부모님과 진솔한 대화를 가져야 한다.
부모님이 분명한 기대치를 갖도록 하는 것은 불필요한 스트레스와 오해, 실망, 낙담, 버려짐의 두려움 등을 해소하는데 도움을 준다.
드럭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부모자식 간의 사랑에도 올바른 접근법과 그릇된 접근법이 있다. 제대로 사랑하는 방법을 모르면 모두가 상처를 입게 된다.
<뉴욕타임스 특약기사>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