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의과대학·대학병원에도 무차별 선심쓰기
▶ 무료 샘플약·로고 새긴 사무용품·잦은 음식대접… 연구기금·학술대회 후원·고액 강연료 등 막대한 투자 의대들‘향응문화 근절-외부자금 유치’ 싸고 딜레마
레지던트 과정은 가혹하다. 무엇보다 사교와 음식의‘황무지’다. 사람을 만날 시간도 없고, 끼니 때 마다 느긋하게 식사를 즐길 형편도 못 된다. 30대 갈색머리 여성인 셰릴이 어렵잖게 수련의들의‘대모’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을 둘러싼 황무지 같은 환경 탓이었다.
그녀는 레지던트들의 푸념에 늘 귀를 기울였고, 그들의 파티 초대에 기꺼이 응해주었다. 수련의들의 사교모임에 셰릴은 커다란 쟁반에 자신이 직접 만든 브라우니를 한 가득 담아 가져오곤 했다.
그러나 셰릴은 그저 맘 좋은 ‘대모’가 아니었다. 그녀는 잘 나가는 제약회사의 유능한 세일즈 우먼이었다. 레지던트들과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다가 슬그머니 자신이 속한 제약사를 입에 올리거나, 브라우니를 먹고 있는 수련의들의 백색 가운 주머니에 신약개발 설명서를 집어넣어주곤 했다. 그녀의 ‘상술’을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수련의들은 짐짓 외면했다.
일반적으로 레지던트들은 제약사 직원과의 접촉에 너무나도 익숙해진 탓에 그들의 호의와 선물에 도통 거부감을 느끼지 못한다.
사람은 생각보다 쉽게 길들여진다. 주변환경에 길들여지고, 나쁜 습관에 길들여진다.
이런 맥락에서 레지던트가 제약사 세일즈직원의 ‘호의’에도 길들여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수련의들이 모이는 대규모 학술회의장 입구에는 약속이나 한 듯 세일즈 담당자들이 안내책자와 무료 음식, 혹은 기념품 등을 테이블 위에 잔뜩 늘어놓은 채 진을 친다. 워낙 익숙해진 광경이라 행여 이들이 보이지 않으면 무언가 이상하고, 실망스런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길들여짐에는 문제가 있다. 전문의나 교수들을 포함해 그 누구도 세일즈 직원들의 ‘임재’에 토를 달지 않는 상황에서 수련의들은 그들이 왜 그토록 우호적이고 협조적인지에 관해 깊이 생각하려들지 않는다.
그들이 공짜로 나누어주는 선물은 누군가 대가를 지불한 것이지만 레지던트들은 실제로 돈을 지불한 ‘전주’가 누구인지 캐물으려들지 않는다. 뻔히 알면서도 모른 척 하거나, 아니면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여겨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폴린 첸 역시 마찬가지였다.
처방을 할 때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첫 번째 생각은 점심식사를 함께 하며 셰릴이 슬쩍 흘린 약품 이름이었다. 병증에 의거해 약을 추천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마음은 ‘교본’의 내용과는 달리 움직였다.
그러던 어느 날 셰릴이 작별의 인사조차 없이 갑자기 사라지자 수련의들은 그녀가 해고당한 것으로 추정했다. 셰릴의 후임자 앞에서 가급적 그녀에 관한 이야기를 자제한 것은 셰릴에 대한 배려가 앞섰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1년 뒤 첸은 우연히 마주친 셰릴의 이전 직장 동료로부터 뜻밖의 소식을 접했다. 해고된 줄로만 알았던 셰릴이 애송이 레지던트들을 상대로 올린 혁혁한 전과를 인정받아 본사 고위 중역으로 자리를 옮겼다는 소식이었다. 그때서야 첸은 셰릴의 ‘본색’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제약사들과 의료기구업계가 의사들과의 돈독한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오랜 시간에 걸쳐 수십억 달러의 자금과 엄청난 노력을 퍼부었다.
영향력 있는 의사들에게 고액의 강연료를 지불했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전공의들에게 식사를 제공했다.
회사명과 로고가 찍힌 볼펜과 노트패드, 샘플약 등이 이들이 지출하는 판촉경비의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이외에 수억달러가 교육 프로그램으로 흘러들어간다. 특히 의사면허 유지를 위해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하는 학술대회에 업계가 푸는 막대한 자금이 유입된다.
이 같은 판촉용 ‘퍼주기’의 최대 수혜자는 의과대학과 대학병원이다. 병원 관계자들이 이들의 장삿속을 모를 리 없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특혜와 공짜 선물에 익숙해지고 길들여지기 마련이다. 비정상이 정상으로 둔갑하는 도덕적 ‘기준 변화’는 시간문제다.
지난 2007년 미의대생협회가 팜프리 스코어카드(PharmFree Scorecard)를 작성해 발표한 것도 대학병원의 ‘도덕적 해이’를 경계하기 위해서였다. 팜프리 성적표는 제약업계와 의대생 및 교수 사이의 상호작용을 규제하는 정책의 강도를 심사해 전국 의과대학의 점수를 매기는 시스템이다.
여기에 자극받아 미 의과대학협회는 대학병원의 교육과정에서 제약사들의 입김을 차단할 것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뿌리 깊은 고질적 관행은 성명서 발표나 성적표 작성만으로 근절되지 않았다. 의식전환 노력이 구태에서 벗어나는데 어느정도 효과를 보였는지 객관적으로 측정하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단일 대학병원 신참 의사들의 처방습관에 초점을 맞춘 소규모 조사는 이들이 제약사의 영향에서 다소 자유로워졌음을 시사했으나 뚜렷한 추세는 포착되지 않았다.
연구팀은 1,500여명의 의대생과 700여명의 수련의 및 전공의들을 대상으로 제약회사나 의료기기제조사 판촉직원들과의 접촉여부를 조사했다.
그 결과 이들과 업계가 이전만큼 긴밀한 관계를 갖지는 않는 것으로 밝혀졌지만 의대생의 절반가량이 업체들로부터 선물을 받은 적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선물은 기업 로고가 찍힌 볼펜이나 메모지, 도넛과 피자 등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수련의와 전공의의 4분의 1 이상은 병원 혹은 학교 밖에서 식사 대접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캠퍼스 안에서의 향응은 병원과 학교의 규정에 어긋난다는 점을 감안, 아예 이들의 관할권 밖으로 학생들을 끌어내 푸짐한 식사를 대접하는 ‘우회전략’을 구사한 셈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의과대학생의 15%는 대학 입학 첫 해와 마지막 해에 제약회사 세일즈 담당자로부터 무료 약품샘플을 받았다고 시인했다.
일반내과저널에 게재된 보고서의 주 작성자인 보스턴 소재 ‘브리검 앤 위민스 하스피틀’의 아론 케셀하임 박사는 “의대 수련의들과 업계의 상호작용이 수련생들의 교육목표 달성에 어떤 도움을 줄지 도무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팜프리 스코어카드 성적이나 의과대학의 공식적인 규제정책 강도는 학생들이 제약사들로부터 선물을 받는 빈도와 거의 무관한 것으로 드러났다. 제아무리 엄격한 정책을 시행한다 해도 학생들의 자발적 의식전환 없이는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힘들다는 얘기다.
반면 국립보건원(NIH)으로부터 높은 수준의 자금지원을 받는 의과대학들은 정부기관의 그랜트 수령자격을 얻기 위해 이해상충을 막는 엄격한 규정을 시행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많은 의과대학들은 보다 나은 교육환경을 원하고 있으며, 제도화된 향응문화를 근절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이로 인해 엄청난 학자금 대출을 받은 의대생들의 부담이 늘어날 수 있다. 그래도 의과대학들은 이런 가능성을 제쳐둔 채 ‘개혁’ 추진에 무게를 싣고 있다.
인명을 다루는 의술을 흔히 인술이라고 부른다. 여기에 상업주의가 끼어들 때 의술은 상술로 변질되고 만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 특약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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