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미 전문의보드 지침에 의사도 환자도 난감
▶ 자궁경부암 검사법으로 항문암 치료해온 여의사 “작년에만 남성 110명 시술했는데 이제 어찌하나” “협회 독단에 늘어나는 항문암 예방대책 물거품”
약 두달 전, 엘리자베스 스티어 박사는 산부인과 전문의 자격을 상실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큰 충격을 받았다. 항문암 위험이 높은 남성에 대한 치료를 중단하지 않으면 전문의 인증을 취소한다는 산부인과 전문의 보드의 최후통첩이 발령된 것이다. 항문암은 희귀질병이다. 하지만 치명적인 질병으로 특히 남성과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된 여성 사이에서 발병률 또한 높아지는 추세다. 경부암과 마찬가지로 항문암은 보통 성적으로 전염되는 인유두종 바이러스(HPV)에 의해 초래된다.
보스턴 메디칼 센터에서 근무하는 스티어 박사의 환자는 대부분 여성이다. 그러나 여성 환자들의 자궁경부암 검사를 위해 개발한 기법을 이용해 지난해 110명의 남성을 치료했다.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지난 9월12일 산부인과 보드는 자체 웹사이트를 통해 “남성 환자 치료불가”라는 보드의 공식 지침을 전달했다. 뿐만 아니라 자궁경부암 치료과정에서 개발한 항문경검사 기법도 남성에게 시술해선 안 된다고 못 박았다.
의사 입장에서 보드의 지침이나 권고를 무시할 수 없다. 그랬다간 인증 취소를 당하게 되고 결국 자격상실로 직업을 잃게 된다. 밥벌이를 계속하려면 보드의 지침을 준수해야 한다.
스티어 박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입장이다. 그녀의 연구에 참여한 동료들은 곤혹스러워했고, 스티어 박사에게 치료를 받아온 남성 환자들은 초조해 했다.
남성 항문암 환자들을 치료해 온 다른 산부인과 전문의들도 난감해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스티어 박사를 비롯한 연구원들은 전국 암연구소로부터 560만달러의 자금 지원을 받아 항문암 예방을 위한 주요 임상실험에 착수할 예정이었다.
이 연구의 책임자는 산부인과 보드에 입장 재고를 요청했다. 그러나 달라스에 기반을 둔 산부인과 보드는 움쩍도 하지 않았다.
보드의 평가국장인 케네스 놀러 박사는 “지침을 변경해야 할 만한 확실한 이유를 전혀 듣지 못했다”고 강조했다.
보드 전무인 래리 길스트랩 박사는 “산부인과란 여성 생식기관의 문제를 치료하고 여성을 돌보는 것으로 그 임무가 국한되어 있다”고 말했다.
그는 1935년 이후 미국의 의료 전문분야는 24개로 확정됐으며 이 가운데 환자의 성을 구체적으로 명시한 분야는 산부인과가 유일하다며 앞으로도 이같은 전통은 그대로 유지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스티어 박사는 “다른 많은 의사들과 마찬가지로 산부인과에 대한 정의가 그렇게 절대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길스트랩 박사는 “산부인과의 임무는 여성에 대한 치료”라며 “전문 분야로서 산부인과 이미지는 돈 되는 사업을 찾아 옆길로 새는 회원들로 인해 크게 훼손된 상태”라고 덧붙였다. 그는 돈 되는 샛길 사업의 대표적인 본보기로 남성 성호르몬 치료와 남녀 모두를 위한 리포석션 등 성형시술을 꼽았다.
브롱크스 소재 몬테피오르 메디칼 센터의 산과역학 전문의 마크 아인스타인 박사는 “보드의 접근방식은 다소 독단적”이라고 지적했다.
스티어 박사의 ‘주특기’는 대략 1.5인치 길이의 튜브에 라이트를 부착한 항문경이라는 기구를 사용해 항문관을 검사하는 것이다.
요즘은 항문경에 확대경을 덧붙인 고화질 버전도 나왔다. 이 기구를 사용해 암 혹은 그 암의 전단계인 전암일 가능성이 있는 항문관의 비정상적 혹을 찾아낸다.
암은 보통 수술을 필요로 하지만 전암의 경우엔 그대로 태워버린다.
미국에서 자궁경부암 발병률 감소는 항문경 검사에 힘입은 바 컸다. 의사들은 이와 유사한 접근법으로 항문암을 줄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현재 미국에서는 매년 약 7,000건의 항문암 케이스가 발생한다. 올해 사망자는 880명에 달할 전망이다. 발병률은 지난 10년간 연 2.2%씩 꾸준히 늘어났다.
항문암 방지를 겨냥한 항문경과 다른 기술들은 아직까지 엄격한 검사를 거치지 않았다.
스티어 박사 팀이 계획한 임상실험의 목적은 이들이 기대했던 역할을 해내는지 여부를 알아보는데 있다.
연구팀은 5,000명의 남녀를 대상으로 8년에 걸쳐 진행될 예정이다. 만약 항문암 예방이 가능하다는 임상실험 결과가 나온다면 치료의 표준을 바꿀 수 있다.
그러나 산부인과 보드의 딴죽걸기로 인해 수백만달러의 지원금까지 확보한 연구의 진행 여부가 불투명한 상황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미 깨어졌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지난 10여년간 남성을 치료해온 스티어 박사는 그 가운데 약 100명을 이번 연구에 참여시킬 계획이었다.
스티어 박사는 연구가 시작도 전에 무산위기에 놓인 것도 걱정이지만 더 이상 남성 환자들을 치료할 수 없다는 점이 더욱 근심스럽다. 전암 판정을 받은 환자들은 일년에 한두 번은 검사를 받아야 한다. 일단 제거된 혹이 다시 자라날 위험이 높기 때문이다.
환자들은 항문경 검사를 쑥스러워하기 때문에 이들과 담당의 사이의 신뢰를 키우는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스티어 박사는 많은 환자들이 치료를 포기할 것으로 우려했다. 그녀가 치료해 온 상당수의 환자들은 가난하고 소수계 집단에 속해 있을 뿐 아니라 HIV 감염자들이 많다. 일부는 셸터에서 생활하고 있고, 다른 일부는 약물복용 전력을 갖고 있다. 여기에 항문 질환까지 포함되면 ‘오명’이 추가된다.
이런 상황에서도 남성 환자들을 연구에 포함시킬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을 치료해 온 스티어 박사의 노력이 인정을 받은 탓이었다. 하지만 이제 상황은 불확실해졌다.
산부인과가 여성만을 위한 전문분야인 것만은 틀림없지만, 보드의 결정이 지나치게 독단적이라 것이 중론이다.
<뉴욕타임스 특약기사>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