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의학자들 ‘소설 속 음주습관’ 분석 흥미
▶ 하루 평균 105그램 알콜 섭취 영국 건강국 ‘경고 수치’의 3배, 간경변 위험 비음주자의 7배 각종 질환으로 50대 중반 사망
이안 플레밍의 소설 주인공인 제임스 본드는 과음에 따른 질환으로 평균수명이 56세 정도에 불과하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사진은 007 본드 역을 맡은 배우 대니얼 크레이그.
제임스 본드는 세련된 ‘터프 가이’의 대명사다. 영국 비밀정보국 MI6 내에서도 가장 비밀스런 부서인 ‘00 공작부’ 소속으로 007이라는 살인면허 번호를 부여받은 본드는 보드카 마티니를 즐겨 마시는 술고래이자 미녀들과 어울려 지내는 바람둥이며, 수백만달러의 나랏돈을 판돈으로 걸고 도박을 하는 뱃심 좋은 노름꾼이다.
귀족 작위를 지닌 영국 소설가 이안 플레밍에 의해 세상 밖으로 나온 본드는 짜릿하고 박진감 넘치는 삶을 사는 강한 남성처럼 보일지 몰라도 뒤집어놓고 보면 위험하기 그지없고 스트레스가 심한 직종에 종사하는 가여운 직장인이다.
커피 대신 술을 마시는 알콜 중독자 수준의 술꾼으로 묘사된 본드는 마티니 칵테일을 흔들어 마신다. 바텐더에게 주문을 할 때에도 “젓지 말고 흔들라”고 지시한다.
그러나 최근 제임스 본드의 생활방식, 특히 그의 음주습관을 집중분석한 영국의 의학자 3인방은 ‘브리티시 메디칼 저널’(BMJ) 성탄 특집호에 게재된 보고서를 통해 “흔들기는 정통 칵테일 제조업이 아니다”고 지적했다.
최상의 보드카 마티니를 만들려면 가느다란 나무 수저로 칵테일 혼합물을 잘 저어주어야 한다. 철제 스푼이 아닌 목제 스터러를 사용해 저어주어야 술의 온도를 높이지 않은 채 원료를 고루 섞어줄 수 있다.
세계에서 가장 세련된 마티니 애호가인 본드가 이같은 기본 상식을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본드는 자신의 마티니를 “젓지 말고 흔들라”고 주문한다. 술, 특히 마티니 칵테일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식견을 지닌 그가 왜 거꾸로 된 제조법을 선호하는 것일까? 3인의 과학자들은 ‘수전증’ 때문일 것으로 추정한다.
그 역시 마티니 칵테일은 저어서 만들어야 제 맛이 난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지만 지나친 음주로 손이 덜덜 떨리는 수전증에 걸린 탓에 스터러를 사용할 수 없어 부득이 흔들어 마시는 쪽을 택하게 됐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BMJ 성탄 특집호는 익살스런 의학 보고서로 유명하다.
하지만 제임스 본드의 술버릇을 집중 분석한 의학자 3인방은 나름대로 진지한 접근법을 취했다. 우선 참고자료 가운데 007 영화를 배제하고 이안 플레밍이 쓴 제임스 본드 시리즈만을 텍스트로 삼았다.
본드 시리즈는 총 14권이지만 이 중 ‘나를 사랑한 스파이’(The Spy Who Loved Me)와 ‘옥터퍼시 앤 리빙 데이라잇’(Octopussy and Liviing Daylights)을 제외한 12권만이 분석 대상에 포함됐다.
‘나를 사랑한 스파이’는 웨이트리스의 관점에서 쓰인 데다 스토리의 3분의 2를 넘어설 때까지 본드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자료 명단에서 제외됐다. 반면 여러 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옥터퍼시 앤 리빙 데이라잇’은 본드의 라이프스타일을 보여주는 묘사가 없어 탈락했다.
일단 기초 분석 자료를 확정지은 의학자들은 12편의 본드 시리즈를 읽으며 그의 음주습관과 구체적 활동 등을 꼼꼼하게 노트했다.
그가 술을 마시는 대목이 나올 때마다 위키피디아를 참고해 해당 칵테일의 원료와 알콜도수 등을 알아냈다.
본드가 마신 술의 분량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 예를 들어 몇 잔의 마니티를 마셨는지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은 채 “취기가 돌았다”거나 “침실로 술을 주문했다”는 등의 애매한 표현이 나올 때는 그의 평소 음주습관을 기준삼아 추정치를 보수적으로 잡았다.
이같은 과정을 거쳐 연구팀은 12권의 소설이 도합 123.5일에 걸친 본드의 활약을 담고 있으며 이 기간에 그가 마신 순수 알콜이 무려 9,201.2그램에 달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여기서 말하는 9,201.2그램은 그가 들이킨 칵테일의 총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포함된 알콜을 순도 200도의 에탄올로 환산한 수치다.
더 알기 쉽게 풀이하자면 주당 521.6그램, 하루 74.5그램의 순 알콜을 물마시듯 들이켰다는 뜻이다.
참고로 영국 국립건강서비스국은 남성의 경우 순수 알콜 기준으로 주당 168그램, 하루 32그램 이상은 마시지 말아야 하며 최소한 일 주일에 두 번은 술을 입에 대지 말 것을 강력히 권장한다.
책에 기록된 총 123.5일 중 본드가 술을 마시지 않은 날은 48.5일에 불과하다. 게다가 이 가운데 36일은 자신의 선택에 의해 금주를 한 것이 아니었다. 교도소에 갇혔거나 병원에 입원했거나 그것도 아니면 재활치료를 받느라 술에 대한 접근이 원천적으로 차단된 상태였다.
123.5일에서 비자발적 금주가 이루어진 36일을 제한 87.5일 동안 그가 마신 순수 알콜은 주당 평균 738그램으로 하루 평균 105.1그램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 수치는 단순 평균치일 뿐이다. ‘From Russia with Love’를 보면 비밀작전에 투입된 지 3일째 되던 날 본드는 24시간 사이에 398.4그램의 순수 알콜을 마신 것으로 나와 있다. 마티니만으로 그 정도의 순수 알콜을 섭취하려면 100도(100-proof)짜리 보드카로 만든 칵테일 14잔을 연거푸 마셔야 한다.
본드처럼 상습적으로 과음을 하면 마시면 몸이 망가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습관적 과음은 고혈압, 뇌졸중, 우울증과 성기능부전 등을 초래한다.
소설 속의 본드는 미녀라면 사족을 못 쓰는 호색한이다. 하지만 그의 음주습관으로 볼 때 침대에서 전혀 힘을 쓰지 못해야 정상이다.
실제상황이라면 그는 발기부전 환자일 가능성이 높다. 이런 면에서 이안 플레밍이 묘사한 본드의 화려하고 분방한 성생활은 현실성이 크게 떨어진다.
반면 의학적 측면에서 보면 그가 간경변에 걸릴 위험은 비음주자에 비해 7배 이상 높다. BMJ 연구에 따르면 간경변 환자의 평균 수명은 59세에 불과하다.
마티니를 즐기는 애주가이자 골초인 작가 이안 플레밍도 심장병으로 56세에 타계했다. BMJ 보고서를 작성한 연구팀은 “본드의 기대 수명 역시 그 정도일 것”으로 추정했다.
‘문 레이커’에서 본드는 자신이 45세 이전에 죽임을 당하거나 MI6의 00 비밀공작부에서 은퇴할 것으로 예상한다. 그가 몸담은 직종과 업무내용 및 라이프스타일로 보면 지극히 현실적인 전망이다.
‘골드핑거’에서 본드는 오릭 골드핑거와 대작하며 총 144그램의 순수 알콜을 섭취한 후 숙소로 가기 위해 운전대를 잡는다. 사고위험이 극히 높은 ‘야밤 취중운전’이다.
‘카지노 로열’에서는 312그램의 순수 알콜이 몸 안에 들어간 상태에서 차량 추격전을 벌이다 사고를 일으켜 2주간 병원 신세를 지는 장면이 나온다.
본드의 과음은 업무 스트레스의 결과일 수 있다. 또한 그가 접촉하고 다루어야 하는 인물들은 국제 테러리스트거나 거액의 도박판을 벌이는 노름꾼들로 금주와는 거리가 먼 부류다.
하지만 BMJ 보고서를 작성한 3인의 의학자들은 “어떤 이유에서건 제임스 본드의 과음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며 “그는 정밀검사를 받아야 하며 안전한 수준으로 음주량을 줄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어쩔 수 없는 의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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