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생후 8일만에 중증 판명 후 의사길 가기까지
▶ 이틀에 한 번씩 수혈…친구·이웃들 흡혈귀처럼 대해 의사들과 늘 대화, 자연스레 의학전공 ‘혈액전문의’로, ‘에이즈=죽음’ 더 이상 아니듯 혈우병도 정복되길 기대
스탠포드 의과대학의 혈액학자인 홀부륵 콜트 박사(36)는 반평생을 환자로 지냈다. 그는 중증 혈우병 환자이다. 유전성 질환인 혈우병은 한 번 피가 나오면 쉽게 멈추지 않는 고약스런 병이다.
의사도 사람이니 당연히 병에 걸린다. 감기나 독감이 의사라고 피해 가지 않는다. 심장질환이나 정신병도 마찬가지다. 스탠포드 의과대학의 혈액학자인 홀부륵 콜트 박사(36)는 반평생을 환자로 지냈다. 그는 중증 혈우병 환자이다. 유전성 질환인 혈우병은 한 번 피가 나오면 쉽게 멈추지 않는 고약스런 병이다. 자칫 코피라도 터지면 병원 응급실로 달려가야 한다. 코트 박사와 같은 혈우병 환자의 몸은 피를 멈추게 하는 혈액 응고인자를 스스로 만들어내지 못한다. 혈우병은 유전성 질환이지만 그의 직계 가족은 멀쩡하다.
코트 박사가 혈우병 환자라는 사실은 포경수술 탓에 밝혀졌다. 태어난 후 8일 만에 포경수술을 받았는데 도무지 피가 멈추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소아과 전문의였고, 어머니는 간호사였지만 둘 모두 지혈이 안 되는 이유를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코트가 태어난 1977년 당시 펜실베니아주 벽촌인 레익 월렌포팩에서 혈우병에 관한 기초적 지식을 지닌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피가 멎을 기미를 보이지 않자 아버지와 어버니는 차로 세 시간을 달려 아들을 ‘칠드런스 하스피틀’로 데려갔다. 그러나 그곳의 의사들도 혈우병에 관해 무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어머니가 아들을 학대한 것으로 오해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갓난쟁이인 코트의 몸에는 설명되지 않은 시퍼런 멍이 여기 저기 나있었다.
몇 가지 검사를 거친 후에야 정확한 병명이 나왔다. 그는 희귀한 형태의 중증 혈우병을 앓고 있었다. 유전자의 무작위 변이가 만들어낸 병이었다.
아들의 병명을 알게 된 후 그의 부모는 중증 혈우병 환자인 아들을 보살피는데 전력했다.
어머니는 어린 쿠크의 방에 충격을 흡수하는 패딩을 설치했다. 벽에 부딪히거나 바닥에 쓰러져 상처를 입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혈우병 환자에게 출혈을 동반한 상처는 치명적이다. 과다출혈로 연결돼 사망에 이를 수 있다.
그는 또 하루 종일 헬멧을 쓰고 지내야 했다. 이 역시 찰과상이나 타박상에 대비한 안전장치였다. 그러나 아무리 조심을 해도 탈은 나게 마련이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그는 세 시간 거리에 있는 칠드런스 하스피틀의 응급실로 실려 갔다. 이런 환경에서 정상적인 어린 시절을 보내기란 불가능했다.
혈우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마을 사람들의 곱지 않은 눈초리도 부담스러웠다.
코트는 수혈을 통해 이틀에 한 번씩 응혈인자를 주입받아야 했다. 이 과정을 생략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사망유희’였다.
하지만 그가 사는 마을에는 종교적인 이유로 수혈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은 거의 매일 그의 집 앞으로 몰려와 초인종을 눌러대고 “지옥에나 떨어지라”는 악담을 퍼부었다.
스쿨버스 안에서도 그는 조롱거리였다. 아이들에게 그는 타인의 피를 필요로 하는 흡혈귀 같은 존재였다.
사춘기로 접어들자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그 당시 최대 이슈는 에이즈였다. 벽촌 사람들도 에이즈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문제는 그들이 에이즈와 혈우병의 차이를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공교롭게도 에이즈 바이러스인 HIV 감염자 가운데에는 혈우병 환자가 유난히 많았다. 거기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혈우병 환자는 이틀 간격으로 응고인자를 수혈 받아야 했는데, 필요한 분량을 뽑아내기 위해선 수백명, 경우에 따라선 수천명의 피에서 이를 추출해야 했다.
당시만 해도 혈액은행은 혈액 기증자가 HIV 보균자인지 여부를 확인하지 않았다.
에이즈가 만연되는 상황이다 보니 혈액 기증자들 중 한두 명의 HIV 보균자가 끼어드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실제로 상당수의 혈우병 환자들은 수혈을 통해 AIDS 바이러스에 감염됐고 감염자의 95%가 사망했다.
혈우병의 개념조차 없는 마을 사람들이 이같은 사정을 이해할 리 만무했다. 그들에게 에이즈와 혈우병은 그저 한 통속의 몹쓸 병일 뿐이었다.
그는 여덟 살 때부터 매년 혈우병 아동들을 위한 특별 여름캠프에 참여했다. 첫 해엔 200명이 모였지만 8년 후에는 프로그램 자체가 중단됐다. 8년 사이에 코트와 다른 한 명을 제회하곤 모두가 저 세상 사람이 된 탓이었다.
코트는 인생의 여러 단계 중 청소년기에 이런 일들을 겪었다는 사실이 오히려 다행이었다고 말했다. 죽음의 문턱에 서 있는 10대는 사안의 중대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분명 잊지 못할 무서운 경험이긴 하지만 팔팔한 10대는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미래를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만약 그가 중년이나 장년이었다면 오히려 상황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채 속절없이 무너졌을 지도 모른다.
코트가 HIV에 감염되지 않은 것은 차라리 기적이었다. 그렇다고 그도 감염이라는 복명을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다. 열세 살 되던 해 덜컥 C형 바이러스에 걸리고 만 것. 역시 수혈을 통한 감염이었다. 이로 인해 두 달간 병원신세를 졌으나 그는 위험한 고비를 넘기고 퇴원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그의 몸이 C형 바이러스에 완전한 항체반응을 보이며 자연적으로 균을 쓸어냈다.
요즘은 응혈인자를 유전공학을 통해 ‘제조’하기 때문에 감염 우려는 현격하게 떨어졌다. 피를 응고시키는데 필요한 단백질을 햄스터의 자궁 안에 집어넣은 후 거기서 생성된 응혈인자를 추출하는 방식이 보편화됐다.
어려서부터 그는 친구보다 의사들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가 의술의 길을 택한 것은 이같은 성장 배경의 자연스런 귀결인지도 모른다. 혈우병 환자인 그가 혈액 전문의가 된 것도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의료인으로서의 삶을 선택한 배경과 관련, 그는 자신이 직접 경험한 중개의학(translationalmedicine)에 매료됐기 때문이라고 털어놓았다.
그가 의대에 지원한 2000년에는 청소년기에 기승을 부리던 에이즈가 한풀 꺾인 상태였다. 선진국에서는 치명적 돌림병이 아니라 만성 질환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그는 생화학의 눈부신 발전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혈우병 역시 에이즈와 같은 궤적을 그릴 것으로 내다봤다.
코트 박사는 “내 몸의 면역체계가 C형 간염을 자연적으로 치유한 것과 마찬가지로 암에 대해서도 같은 반응을 보일 수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내가 진행 중인 연구의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이 혈우병 환자라는 사실에서 삶의 추동력을 끌어냈다고 말했다.
풍랑은 늘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지만 경우에 따라선 배를 더욱 빠른 속도로 밀어주는 역할도 담당한다.
미래가 불투명했던 그는 어릴 적부터 원하는 바를 가급적 빨리 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건강한 사람의 평균수명은 그에겐 별 의미가 없다.
연구는 끈기를 요구한다. 유아시절부터 중병에 시달려온 사람이라면 매일매일을 최대한 유용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우치게 된다.
그에겐 원망이나 불평이 없다. 늘 감사가 있을 뿐이다. 목적이 이끄는 삶 속에서 그는 평안하다.
<뉴욕타임스 특약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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