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만명이 넘는 한국인이 관람한 ‘변호인’은 전두환 시절 부산에서 일어난 ‘부림 사건’을 소재로 만들어졌다.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은 모두 ‘빨갱이’로 몰던 시절, 부산에서 독서 클럽에 다니는 학생과 회사원들을 고문해 공산주의자로 몬 후 국가보안법을 적용해 감옥에 가뒀다. 당시 잘 나가던 세법 변호사이던 노무현이 이들의 변론을 맡으면서 인권 변호사의 길로 접어들며, 나중에 대통령까지 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재판정에서 송강호가 피고들을 변호하는 장면이다. 그 중에서도 눈길을 끄는 것은 E H 카가 쓴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두고 검찰과 논쟁을 벌이는 부분이다. 여기서 변호인은 이 책이 불온서적이고 카는 소련 간첩이라는 검찰 측 주장을 반박하며 카가 소련에 오래 산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영국 외교관 신분으로 공무 수행 차원이었을 뿐 스파이가 아니며 영국 대사관도 카는 훌륭한 인물이며 간첩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해줬다고 주장한다.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는 70~80년대 운동권 서클의 필독서 중의 하나였다.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는 공산 서적과는 거리가 멀다. 카가 소련에 오래 체류했지만 소련 스파이가 아니라 영국 외교관이었다는 사실도 맞다. 그럼에도 카를 사상의 자유의 상징으로 들고 나오는 것은 적절치 않다. 그는 스탈린 찬미자였기 때문이다.
1930년대 서유럽과 미국이 대공황으로 신음하고 있을 때 스탈린 치하의 소련은 5개년 계획을 세워가며 착실한 성장을 거듭했다.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카의 입장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스탈린 사후 강제 수용소와 대량 학살 등 그의 죄상이 밝혀진 뒤에도 카는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또 히틀러 찬미자이기도 했다. 히틀러가 베르사유 조약을 깨고 라인란트에 진군했을 때도 히틀러를 옹호했고 체코를 집어 삼키려 했을 때도 지지했으며 그와 맞서 싸워야 한다는 처칠을 “미친 사람”이라고 불렀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강제수용소와 유대인 학살 등 나치의 만행이 적나라하게 밝혀진 후에도 그는 참회한 적이 없다.
이런 인물의 책이 ‘진보’ 운동권의 필독 도서가 되고 아직까지 영화를 통해 변호되고 있다는 것은 한국 ‘진보’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우상과 이성’, ‘전환시대의 논리’ 등을 통해 ‘한국 운동권의 대부’로 불리는 리영희는 모택동과 문화혁명 찬미자였다. 훗날 모택동과 4인방의 죄가 백일하에 드러난 후에도 그는 스스로 반성한 적이 없다.
지난 주 한국 법원은 내란음모죄로 기소된 통합진보당의 ‘몸통’ 이석기에게 징역 12년을 언도했다. 녹취록과 여러 증언 등을 통해 내란 모의 사실이 밝혀졌음에도 통진당은 이것이 30년 전 부림 사건처럼 용공 조작이란 주장을 되풀이 하고 있다. 남한의 자유민주주의와 북한의 김씨 유일 왕조 어느 쪽이 인간을 더 잘 살게 하는 체제인가가 이미 오래 전에 결정 났음에도 이들은 아직도 북쪽이 진정한 조국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지금 한국에선 통진당의 극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그 흔하던 촛불 시위 하나 보이지 않고 있다. 틈만 나면 박근혜 독재 정권 물러가라며 정의를 구현한다는 사제들도 이석기 유죄 판결에 대해서는 조용하다. 지난 1년여간 부정 경선과 내란 음모를 둘러싼 통진당의 행태를 지켜보면서 더 이상 이들과는 상종할 수 없다는 컨센서스가 한국 ‘진보’ 사이에도 이뤄진 모양이다.
한국의 ‘진보’는 박정희 전두환 철권통치와 싸우며 한국 민주주의를 앞당기는데 분명한 기여를 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자기는 모든 것이 옳고 자기를 반대하는 자는 모두 악이라는 독선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의 진보가 이런 아집에서 깨어나 약자의 권익을 옹호하고 모든 사람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힘쓰는 본연의 자세로 돌아갈 때 지금 1%대에 머물고 있는 지지율도 올라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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