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가뭄 끝에 내린 며칠간의 단비가 오늘 오후의 하늘을 더욱 맑고 투명하게 씻어놓았다. 밀린 빨래를 세탁기에 집어넣고 마당에 나가 스페니쉬 기타 음악을 듣는다. 오랜만에 애수어린 감상에 한껏 젖어본다. 알 수 없는 슬픔이 잔물결처럼 밀려온다. 어떻게 음악이 가슴을 이리도 헤집어놓을 수 있는 걸까.
느닷없이 이 세상엔 천재적인 예술가들이 얼마나 많을지, 또 얼마나 많은 천재성을 지닌 예술가들이 이 세상에서 이름없이 사라졌을지를 생각한다. 비단 이름뿐이랴, 얼마나 많은 땀과 고통과 열정으로 이루어진 작품들이 먼지 속으로 사라졌을 것인가.
작품을 사람들의 가슴에 남기고 가는 게 예술가들의 몫이라면 그 예술가들을 한낱 흙먼지로 거두어 가는 것은 더욱 큰 알 수 없는 힘이다. 다만 삶이라는 엄청나게 짧은 이 시간에 우리는 신의 영역에 찰나의 순간이라도 발을 들여놓고 싶어한다. 어느 한 순간만이라도 신의 손이 우리를 움직여 소리를, 그림을, 형상을, 글을 만들고, 쓰고, 빚기를 열망한다. 때론 고통의 심연에서 허우적대다가, 때론 열에 들뜬 광기 속에서, 때론 끓는 분노 가운데, 때론 가없이 펼쳐지는 고요 안에서 우린 신을 만난다. 그 순간이 피카소를, 고흐를 만드는 것이 아니던가.
그러한 피카소들, 고흐들이 그 먼 옛날로부터 이 시대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았을 것인가를 생각하면 나의 이 재주란 얼마나 미천한 것인지…,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온 세상에 누구에게든 공평하게 펼쳐져 있는 하늘. 미천하나 나의 이 작은 재주를 감사한다. 비록 세상에 이름을 떨치지 못해도, 소통의 길이 없어도, 또 그 재주로 밥을 벌지 못해도 그것 때문에 더 이상 고통 받진 않으리라. 부끄러워하지도 않으리라. 그저 누리고 평안하리라.
내 두 손을 펼쳐 가만히 들여다본다. 너무 무리하게 함부로 다루어서 마디들이 튕겨져 나와 손가락들은 전부 구부정하고 주름은 수없는 깊은 골들을 이루고 있다. 가늘고 긴 손가락들이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이 손들은 대체 아무런 항의도 하지 못한단 말인가. 단 한마디의 불평도 없이 험난한 일들을 도맡아 해왔단 말인가. 그런데 말이다, 나는 이 두 손보다도 못하지 않았던가.
손은 아무 저항도 불평도 하지 않고 내가 시키는 대로 충실히 무엇이든 군말 없이 하지 않는가. 그러나 나는 오래도록 셀 수도 없이 많은 불평과 항의와 욕설을 뱉어내고 내 시시한 운명에 저항하였다. 나는 신의 몸에 붙은 손이었음에도 끊임없이 손이 되기를 거부했었다. 계속 가늘고 긴 손가락들만 우기면서 도대체 왜 내게 시련과 고통이 주어지는지에 대해서만 따져 물었다.
비록 굵고 보기 싫은 손가락들을 지닌 손이긴 해도 오늘 내 손은 아름다워 보인다. 이제껏 내 삶의 희로애락을 덕지덕지 묻힌 채 말없이 나의 어리석음을 일러주니 말이다.
이제 너무 많은 설명들, 나의 의도와 생각들, 시도, 고집 등등 온통 나로 꽉 차 있는 작품들을 앞에 두고 나를 지우는 연습을 한다.
연습 하나, 종이를 태운다. 불이 남긴 검은 선들, 그 사이사이에 서린 침묵이 좋다. 현란한 몸놀림을 가진 불꽃이 그렇게도 깊은 침묵을 남길 수 있다니. 불꽃 자체였던 시간은 이미 멀리 가버렸다. 지나가 버렸다. 나는 단지 태우는 일을 하고 불은 한없이 깊은 침묵을 그려낸다.
연습 둘, 물을 흘린다. 화면을 타고 내리는 물은 비가 되고 강물이 되고 구름이, 산이, 나무가 되고 눈물이 된다. 물이 그려내는 화면은 그대로 자연이다. 난 거기 다만 물을 흘리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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