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에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날, 그 의의를 더욱 되새겨야 하는 중요한 날이 있다. 바로 4월19일이다. 1960년 4월 19일, 필자는 대학 3학년생이었다. 등교해 보니 전날 데모 중이던 고려대 학생들이 정치폭력배 이정재 수하들에게 피격을 당한 사건으로 교내 분위기는 술렁이고 있었다. 학생들이 삼삼오오 교정에 모여드는가 싶더니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교문 밖으로 밀려나가기 시작하였다.
종암동에 위치한 고려대에서 한 블럭 떨어져 있던 필자의 학교에서 지금의 시청 뒤 프레스센터 건너편에 있던 국회의사당 앞까지 거의 뛰다시피 달려간 후 연좌한 채 부정선거 규탄과 선거무효를 부르짖었다.
오래지 않아 남대문으로부터 광화문 앞 일대는 데모군중으로 발 디딜 틈도 없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정오가 넘어 성난 데모대가 경무대(현 청와대)로 향하면서 경찰의 발포가 시작되었고 희생자가 속출하면서 본격적인 진압작전이 전개되었다.
마침 인근에 있던 서울신문사에 불이 나자 우리는 철수하기로 결정하고 대오를 유지한 채 도보로 컴컴해진 교정에 도착하였다. 필자의 집은 남산동에 있었기 때문에 경찰진압 망을 피해 골목길을 이용해서 밤늦게 귀가할 수 있었다. 집에 와보니 통행이 막혀 귀가할 수 없는 시내 외곽에 사는 친척들이 여러 명 모여 있었다.
며칠 후 계엄령 속에서 대학교수들의 항의시위와 부통령 당선자 이기붕 일가의 자살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와 하와이 망명으로 정국은 급격한 변혁을 맞게 되었다.
4.19 학생의거는 부정선거와 시위 학생 김주열 군의 사망이 도화선이 되었던 한국 최초의 정치개혁 운동이었지만 그 주동세력이 학생이었던 관계로 국정운영은 이 사태를 가져온 정당과 정치인에게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럼에도 정치권은 정신을 못 차리고 당쟁과 정파 갈등을 일삼아 한국은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 사회, 안보 등 총체적 난국에 빠져 백척간두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렇게 볼 때 1년 후에 일어난 박정희의 군사혁명은 정치권이 자초한 자업자득이며 오랜 군부 집권을 가능케 한 빌미를 제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군사정권과 그 후의 군인정부 시절 대부분의 민주화 운동과 정치개혁은 학생들에 의해 추진되었다. 정치권은 오히려 선거 때마다 이합집산과 당파싸움을 되풀이 하며 자신들의 밥그릇만 챙기는 후진성을 되풀이 하였다.
지난날을 뒤돌아 볼 때 4.19 학생의거는 권력을 잡으려는 것이 아니라 정치를 바로 잡으려는 학생들의 순수한 운동이었다. 5.16 군사혁명도 4.19 학생의거로 유발된 후속사건이 아니라 정치혁신을 완성시키려는 필연으로 재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5.16 혁명으로 인해서 정치적 피해와 불이익을 입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국적으로 평가할 때 그런 부정적인 면을 뛰어넘는 공적을 남겼고 특히 독재자의 딸인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은 온 국민이 면죄부를 준 정치적인 승리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4.19 학생의거의 단초가 되었던 정치권은 예나 지금이나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기를 기다리는’상태이다. 그들이 떠들어 대는 정치쇄신과 민생복지가 얼마나 공허하고 가소로운지 국민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4.19 학생의거는 아직 끝나지 않은 미완의 혁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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