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마음이 몹시 분주하다. 3주 동안의 한국 방문을 앞두고 직장 일에서부터 집안일에 이르기까지 미리 처리해 놓고 가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빠듯한 시간과 경제적인 여건을 무릅쓰고 한국에 가는 이유는 한국에 계신 친정어머니를 뵙기 위해서이다. 주변에서, 사느라 바빠 십수년 세월 동안 한국에 한 번도 다녀오지 못하다가 부모님의 부음이나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급하게 달려 나가는 사람들을 적잖이 보아온 터라, 아직 건강하신 어머니를 뵈러 나가는 행운에 감사할 따름이다.
여든을 훨씬 넘기신 어머니는 아직도 아파트에 혼자 사신다. 물론 건강이 따라주니 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상당 부분은 본인의 엄격한 자기 관리 덕분이기도 하다. 어머니께서 가장 두려워하시는 일이 “자식들에게 짐이 되는 것”이니, 오랜 세월 아무리 맛있는 것이 있어도 과식하는 법이 없으셨고, 아무리 피곤해도 운동(산책과 체조 정도지만)을 거르지 않으셨다.
내가 어머니를 “태어날 때부터 엄마였던 사람”이나 “일제시대에 태어나 식민통치와 6.25를 겪은 (그래서 말 안 통하는)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만 보지 않고, 자신만의 꿈과 욕구를 지닌 한 여성으로 보기 시작한 것은 나 스스로 엄마가 되고서도 한참이나 지나서였다.
아마도 처음 살짝 놀랐던 것은 어머니가 여행지에서 보내온 엽서 때문이었을 것이다. 성지순례를 떠나신 어머니가 터키, 이스탄불에서 보내온 그 엽서에는 낯선 문물에 대한 호기심과 설렘이 가득했고, 일상에서 벗어난 들뜸이 곳곳에서 묻어났다.
그 후 어머니는 여행을 가실 때마다 내게 엽서를 보내셨는데, “가이드가 한국 식당에만 데려다 주어 별로 안 좋았다”든가 “현지 사람들이랑 말이 통하면 얼마나 좋겠니? 궁금한 게 너무 많은데 말이야…” 라고 말하여 당신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셨다. 나는 이런 어머니에게 오지 여행가 한비야가 쓴 책을 사다드렸는데, 그 후 한비야는 어머니께 “세상에서 가장 부러운 사람”이 되었다.
그런가 하면 우리 집에 다니러 오셨다가 조정래의 ‘태백산맥’ 10권을 독파하셔서 나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때가 이미 여든을 넘긴 나이였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집안에 혼자 계셔야 하는 것이 죄송스러워 한국 비디오를 잔뜩 빌려다 드렸건만 어머니는 돋보기를 걸치고 밤낮으로 책에만 몰두 하셨다(심지어 어떤 날은 퇴근하는 딸을 위해 밥솥에 밥도 안 안쳐놓으셨다!).
‘태백산맥’이 어떤 책인가. 작가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내사를 받고 곤욕을 치를 만큼 불순한(?) 내용이 아닌가. 혹시라도 중간에 “얘, 이거 빨갱이 책 아니니?”라는 소리가 나오지 않을까 내심 걱정했지만, 어머니께서는 끝까지 책을 놓지 않으시고 “참으로 재미있게, 가슴을 조이며 읽었다”는 명쾌한 독후감을 내 놓으셨다.
나는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이 에피소드들이 감사하다. 만약 이런 순간들이 없었다면 나는 “이번에는 어머니의 어떤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될까” 하는 기대감 대신 “평생을 가족들을 위해 희생한 엄마니까…”라는 각오를 다지며 무거운 발걸음을 떼었을 지도 모른다.
어머니 날이다. 이 날에, 가족들을 위해 인고와 희생의 삶을 살아오신 어머니의 노고를 기리는 것도 좋지만, ‘내 어머니’만이 지니고 있는 인간적 매력과 미덕을 찾아 가족들과 나누는 것도 어머니를 공경하는 좋은 방법이 될 것 같다. “엄마도 태어날 때부터 엄마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모녀지간의 대화도 훨씬 지평이 넓어지고 즐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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