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주한 <공인회계사>
뉴욕에서 비행기로 3시간. 남쪽으로 가면 터크스 케이커스(TCI, Turks and Caicos Islands)라는 섬이 있다. 크기는 맨하탄의 7배 정도. 여기에 3만 명 정도가 살고 있다. 크고 작은 300개의 섬들로 이뤄졌지만, 대부분 Provo라는 맨해튼 크기의 왼쪽 섬에 살고 있다. 국가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아주 작은 섬나라다.
그러나 1년에 100만 명 이상의 관광객들이 찾는, 세계 최고의 해변 휴양지이기도 하다. 이번에 둘러보니, 100만 달러는 줘야 쓸 만한 집을 살 수 있을 만큼 부동산 가격도 아주 높다.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 터크스 케이커스에 대해서 내가 오늘 말을 꺼낸 이유는 그곳으로 놀러가라는 뜻도 아니고, 그 곳에 부동산 투자를 하라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이 섬은 말 그대로 Tax Paradise다. 그 어떤 세금도 없다. 소득세, 법인세, 상속세나 증여세 같은 직접세가 전혀 없다. 집을 팔아도 양도소득세를 내지 않으며 은행이자나 배당금에 대한 세금을 한 푼도 내지 않는다. 다른 종류의 조세 피난처들(tax shelter, tax resort, low-tax haven)보다 훨씬 강하게 해외 부자들이나 법인들을 유혹하는 섬이다.
세금이 없고 법인 설립이 자유로워서 조세 피난처들에는 많은 페이퍼 컴퍼니들이 만들어질 수 밖에 없다. 뉴욕 퀸즈 인구의 10%도 안 되는 버진 아일랜드에는 무려 80만개가 넘는 법인들이 등록돼 있다고 한다. 2001년에 파산한 미국 거대 에너지 업체 엔론(Enron)은 881개에 이르는 역외회사를 갖고 있었는데, 그중 119개가 이 터크스 케이커스 섬에 있었다.
실제 사업은 장사가 잘 되는 뉴욕이나 서울에서 하면서, 사업장 주소지(본사)만 이 섬에 둔다. 그러면 돈이 여기에 설립된 법인으로 흘러가서 계속 쌓이게 된다. 그 돈은 다시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재산은 또다른 재산을 만들어 낸다. 30년전 수업 시간에 배운 이런 내용들이 지금까지 (어쩌면 더욱 활발하게) 이뤄지는 것을 보면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나보다.
이 섬에서 며칠 전에 대형 회계법인 KPMG가 해외금융자산보고(FATCA, FBAR) 관련 세미나를 열었다. 이제 이곳 섬에도 규제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나아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도 FATCA보다 더 강력한 CRS(Common Reporting Standard, 자동 계좌정보 교환 기준)라는 칼을 빼들었다. 터크스 케이커스 섬도 참여한다고 한다. 앞으로 한국이나 미국 사람들이 해외에 금융자산을 숨겨두는 일은 더욱 힘들어질 것이다.
‘보물섬’ 이라는 소설이 있었다. 한쪽은 약탈한 보물을 숨겨두고 다른 쪽은 그 보물을 찾는 130년 전의 소설인데 지금 돌아가는 것이 그 ‘보물섬’과 똑같다. 부자들은 그 섬에 재산을 숨기려 하고, 정부는 그 섬에 숨겨진 재산을 찾아다니니 말이다.
아름다운 터크스 케이커스 섬이 휴양과 해변의 파라다이스 자리는 계속 지킬 수 있을지 몰라도, 앞으로 세금의 파라다이스 자리는 더 이상 지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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