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으니 지난날들이 떠오른다. 어린 시절 새해 전날이면 엄마는 방앗간에서 방금 뽑은 가래떡을 한 광주리 가져와 상 위에 가지런히 하나씩 올려두곤 했다. 떡이 너무 말랑하면 썰기 어려우니 밤새 방안에서 말려야 한다고 하셨다.
궁금한 마음에 몰래 혼자 떡을 썰어보다가 칼에 들러붙어 혼이 난 적도 있다. 얼른 썰어보고 싶은 마음을 달래며 잠자리에 들었다가 아침에 일어나면 밤새 겉은 굳고 안은 살짝 말랑한 떡이 되어 있곤 했다. 직접 썰어보겠다고 난리를 치다가 결국엔 모두 엄마의 일이 되곤 했지만, 칼을 잡고 한줄 썰어보는 일은 참으로 재미있고 신기한 경험이었다.
한편 잘 익은 김치를 털어 돼지고기와 두부, 당면을 넣고 만드는 만두는 우리 집 떡국에 없어서는 안 될 먹거리였다. 기름 냄새 풍기며 지져놓은 전들과 갖가지 나물들보다도 나에게는 그렇게 정성들여 끓여낸 김치만두 떡국이 가장 기다려지는 새해 음식이었다.
잘 고아낸 고기국물에 방금 구워 부셔 넣은 김가루가 떠있는 떡국을 한 수저 뜰 때면 ‘너도 이제 한살 더 먹었다’ 는 엄마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몇 살을 더 먹든 이 떡국은 몇 그릇이고 더 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새해가 오니 나는 음식이 먼저 떠오른다. 지난해 마지막 날 가족과 친구들이 모여 새해를 함께 맞으며 샴페인 잔을 부딪치고 칩과 살사를 먹었고, 새해 아침 스크램블드에그와 계란토스트를 아침으로 만들어준 뒤 혼자 떡국을 끓여먹을 수밖에 없는 건, 내 시간의 기억이 가지고 있는 음식 때문인 듯하다.
뒹굴 거리며 하루를 보내다 오후가 되어 출출해지면 나물과 전들을 함께 넣고 볶아주던 엄마의 섞어 볶음밥까지, 신선한 새해의 아침부터 저녁 무렵까지 온통 음식과 맛의 기억들이 가득하다.
음식은 그래서 그냥 먹고 나면 끝나지 않고 음식을 함께 한 사람들의 모습과 그날의 표정, 대화까지도 그 음식을 통해 깊어지고 추억이 된다. 그 시간이 고유의 맛을 지닌다. 새해가 가진 맛, 내가 기억하는 그 부드럽고 구수하고 군침 도는 떡국의 맛이 다시 힘있게 또 한 해를 살게 하는 나의 새해의 맛이다.
새해 하루가 지나고 나면 보통 별 다를 것 없는 시간이 진행된다. 그래서 365일이 모두 다르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정월 대보름이면 호두를 까고 오곡밥에 나물을 먹었고, 봄이면 막 무쳐낸 봄동 나물에 냉이 된장국, 달래 간장을 비벼먹었다.
여름 하면 푹 고아낸 닭백숙과 시원한 오이냉국, 할머니가 만들어 보내주시던 말린 꽈리고추 튀김이 떠오르고, 가을이면 잘 말린 조기구이, 겨울이면 쿰쿰한 청국장에 김장김치... 이렇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음식들이 줄을 서서 떠오른다.
올 한해도 그 갖가지 맛들이 엮여지며 이어질 것이다. 때로는 상큼하게, 때로는 정신이 번쩍 들게 맵게, 또 언제는 뭉근하게, 또 달착지근하게...
한해의 시간이 이렇게 온갖 맛으로 만들어지듯 나도 다양한 맛을 내며 살고 싶다. 매우면서 달고, 차가우면서 새콤하고, 뜨거우면서 묵직하고, 짜면서 매콤하고...
내가 보내는 하루하루들이 결국은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사는 지를 말해주는 온갖 맛의 잔치가 되면 좋겠다. 밋밋한 한 가지 맛이 아니라 오묘하고 복잡하고 여러 가지가 섞인, 생각과 감정과 노력과 열정이 담긴 다양한 맛의 시간이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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