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1.
어린 시절 아이들과 밖에서 놀다보면 저녁 무렵 된장찌개 냄새가 골목에 흘러나오고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놀던 아이들은 하나 둘 집으로 들어가는데 나도 누가 좀 불러주지.... 하며 서있던 나.
기억2.
한참 낮잠을 자고난 후였을까. 잠에서 막 깨어나 아무도 없는 집안에서 마당으로 나와 밖으로 나가려고 했는데 대문이 열리지 않았다. 목이 쉬도록 울었다. 내가 안에 갇힌 것이라고 생각하며 울었다. 마당에 키우던 개 한마리가 나를 보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꺽꺽 숨이 차도록 울고 난 다음, 정신이 좀 깨었던가, 대문이 열리는 것이다. 안에서 열어야 열린다는걸 그때서야 알았다.
기억3.
숙제도 끝내고 할일 없는 오후 4시경이면 라디오를 켜고 임국희 씨가 진행하는 영화음악을 들었었다. 알 수 없는 기분이 드는 몽롱한 언어들과 음악, 빠다 냄새가 많이 나는 목소리를 들으며 창문 너머 해가 지는 걸 바라보곤 했다. 내게 오후 4-5시, 해가 지는 시간은 그때부터 오랫동안 싫은 시간이었다. 컴컴해지기 시작하는 시간, 혼자 보낸 시간의 정점, 해 그림자와 음악과 목소리가 겹쳐져 만드는 뭔가 알 수없이 낮아지는 시간.
사는 게 바빠 나를 돌볼 수 없었던 부모님은 그렇게 혼자 울거나, 혼자 음악을 듣거나, 혼자 걸어오는 나를 본 적이 없으셨다. 성적표를 잘 받거나 상장을 받아와도 저녁이 되어서야 보고를 할 수 있었다. 스무살이 넘어 선가 기형도 시인의 ‘엄마걱정’이란 시를 보게 되었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틈으로 고요한 빗소리/ 빈 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시인의 유명한 시들을 모두 제치고 나에게는 이 시가 가장 먼저, 가장 강하게 내 마음에 와서 박혔다. 내 유년의 쓸쓸했던 혼자만의 시간들이 떠올라 마음이 먹먹했다. ‘찬밥처럼 방에 담겨’라는 표현을 쓴 시인의 마음이 고스란히 내게도 전해지는 느낌이었다.
엄마에게 떼를 쓰거나 투정을 부리며 엄마의 부재를 탓한 적은 없지만, 어쩌면 나도 모르게 내 안에 그 상실감이 쌓여갔었을까. 혼자 찬밥처럼 방안에 담겨 숙제 하고, 언니가 학교에서 빨리 오기를, 엄마가 빨리 오기를 기다리던 시간은 마음이 좀 불안했던 시간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알고 있다. 그때의 상실과 부재, 외로움의 시간들 덕분에 생각을 키우고 상상력을 쌓고 스스로 강해지려고 노력할 수 있었음을.
지금은 갈등 중이다. 이제 아이가 좀 컸으니 다시 일해야겠다고 생각하면 “아이가 혼자라는 동굴에서 더 성숙하고 생각이 깊어지는 시간도 필요하니 괜찮다”라는 마음과 학교 끝나고 속상한 일을 털어놓는 아이, 기분 좋은 일을 자랑하는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오락가락한다.
성인이 되어서도 오래오래 떠오르고 어쩌면 생애의 시각과 태도를 결정하게 될 아이의 유년의 기억은 내 것보다는 더 따뜻하고, 행복하고, 외롭지 않은 것이길 바랄 뿐이다. 하지만 과연 엄마인 나의 입장에서 현명한 판단이 내려질 수 있을지. 내가 유난히 집착하는 유년의 기억이 사실은 그렇게 대수롭지 않은 건 아닌지, 좀 고민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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