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색은 색이 없다하여 ‘무색’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흰색이라고 이름한다. 하나의 색으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흰색은 경건한 느낌을 주어서 범접하기 어려우면서도 무엇에나 쉽게 배색이 가능하여 까다롭지가 않다. 그렇게 쉬운 색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려운 색이기도 하다.
백이민족이라는 이름을 가진 우리에게는 더욱 친근한 색이라 할 수 있다. 길몽 중에는 언제나 하얀 할머니가 계시고 옛이야기 중에 흰 수염을 가진 할아버지가 등장하면 이미 좋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예시로 가슴이 편안해진다. 흰색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가 숭고하고 상서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나는 흰색 때문에 적잖이 마음고생을 한다. 처음엔 하얗던 흰색 타월들이 서너 번 쓰다보면 우중충해지고 누르스름해져서 몹시 신경에 거슬린다. 손님 앞에 내 놓기도 거북하거니와 내가 써도 찜찜하다. 그렇다고 버릴 수는 없다.
옛날 어머니들이 빨래를 양잿물에 삶아서 쨍쨍한 햇볕에 말리면 뼛속까지 시원하게 희어지던 기억이 자꾸만 나를 꼬득인다. 이른 아침에 양잿물에 삶은 천을 맑은 냇물에 헹궈 자갈밭에 반듯하게 널어두었다가 오후에 가보면 탄성이 터질 만큼 눈부시게 하얗던 장면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그것은 하루에 되지 않는다. 그렇게 여러 날을 바래는 수고가 수양하는 과정인 듯하여 마음에 와 닫는다.
순백하지 못한 부분을 해님에게 의탁하는 수단이라 해도 좋고 죄악을 씻어 내리는 고난의 단계라 해도 좋다. 스피드 시대이며 편의 제일주의의 시대를 역행하는 옛 방식에 대한 그리움을 불식시킬 수가 없었다.
나는 옛 방식을 흉내기로 했다. 타월들을 모아 클로락스 약간 섞은 물에 밤새 담갔다가 뒤뜰 시멘트 바닥에 반듯하게 펴 말린다. 순백하지 못한 요소를 날려 보내는 일이다.
“바래라 바래라. 순백으로 바래라. 상처로 생긴 흉터, 슬펐을 때 생긴 상체기, 알게 모르게 지은 죄, 이유 없이 모욕 받았던 일, 가슴 치도록 억울했던 일, 잊고 싶으나 잊히지 않는 일, 실수 했던 일, 후회스러운 일, 멀리 날려 보내고 백옥같이 희어져라. 그리고 후련하여라.”
빨래와 인간의 내심이 중첩되어 주문을 외우고 있다. 시를 쓰는 심정이다. 빨래를 표백하면서 오염된 마음 밭도 표백하고 여백을 마련하는 작업이다. 그 하얀 공간에 참한 염원을 새로운 언어로 채우려는 것이다.
신 새벽에 젖은 빨래를 펴는 순간의 정갈함은 나만의 것이다. 이것은 기도이며 스스로를 정화시키는 과정일 수 있다. 고고한 순백의 뿌리를 찾으려 엄숙해진 가슴을 쓸어내리며 무언가 멋진 일을 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자연 표백은 하루에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여러 날을 수고해야 하는 그 마디마디가 바로 진수다. 기도는 한 순간에 응답을 얻을 수 없다.
태양은 억수로 많은 능력을 가졌다. 대자연의 모든 식물들을 장악하여 푸름을 낳게 하고 성장시키며, 에너지를 만들어 내고 표백하는 위력까지 과시한다. 그에 압도당하면서 티끌같이 작은 나를 본다.
타월들이 순결한 신부처럼 예뻐지면 백색 타월에 얼굴을 묻고 속삭여 볼 것이다. 흰색이 지닌 모든 가능성을 위하여 고고하게 본색을 지켜 달라고 희망할 것이다. 다시는 우중충한 빛깔로 오염되지 말아달라고. 이제 모든 오점이 소멸되었으니 때 없고 죄 없는 바탕을 지켜달라고 빌 것이다.
어머니! 어머니 방식으로 빨래를 햇볕에 바래고 있습니다. 순백이 되어 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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