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장애우들의 부모와 봉사자들을 만나는 귀한 시간을 얻었다. 세미나를 마치고 돌아오며, 이제는 성인이 된 장애 자녀를 키우는 동안 부모들이 흘렸을 눈물과 아픔과 상실에 대해 생각했다.
우리에게는 이루지 못한 꿈들이 있다. 이뤄지지 않은 사랑과 깨어진 만남들도 있다. 어린 시절 꿈꾸던 대로 살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바라보는 일은 씁쓸하다. 결혼 전 꿈꾸던 행복한 가정이 환상에 불과했음을 알 때 우리는 깊은 상실을 경험한다. 때로 거울 속에 비쳐진 자신의 모습에서도 돌아갈 수 없는 젊음과 팽팽함에 대해 상실감을 느낀다.
어찌 보면 산다는 것은 상실의 연속이다. 우리는 스스로에 대한 상실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도 상실을 경험한다. 내담자들이 고민하고 갈등하는 많은 문제들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대부분은 가족-에게 기대하는 모습을 갖지 못하는 상실감이다.
가질 수 없는 것은 포기해야 한다. 배우자와의 갈등이 힘들어 상담소를 찾는 이들이 많다. 연애 때처럼 다정하고 듬직하고 책임감 넘치던 남편의 모습은 이제 온데 간데 없다며 힘들어하는 아내는 예전의 남편 모습을 이제 장사 지내야 한다. 싹싹하고 순종적인 현모양처이면서 집안의 대소사를 척척 해결해내는 수퍼우먼을 바라는 남편이 있다면, 이제는 바라던 아내의 모습을 장사 지내야 지금의 아내를 받아들일 수 있다. 희망이던 자녀가 이제는 아픔이라면 옛날에 꿈꾸던 자녀의 모습을 내려놓고 지금의 자녀 모습을 받아들여야 한다.
꿈꾸지만 이룰 수 없는 것들이 있고, 갖고 싶지만 가질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고통스럽다. 그것은 내가 간직해온 꿈을 상실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하거나 이별하는 것과 비슷한 애도의 과정을 거친다.
첫 단계는 지금 상대의 모습을 부정하며 상대를 비난하고 바꾸려는데 에너지를 소비한다. 상대만 바뀌면 문제가 해결될 거란 믿음을 가지고 배우자나 자녀에게 계속 잔소리를 하며 정당성을 부여한다.
둘째는 아무리 잔소리를 해도 바뀌지 않는 상대에게 분노하는 단계다. ‘왜 난 이런 사람을 만났을까’ ‘왜 이런 가정에 태어났지?’란 질문을 계속하며 운명을 저주하거나 신에게 분노하거나 잘못된 선택에 대해 스스로를 자책한다.
다음은 상대와 타협과 협상을 하는 단계다. 상대를 바꿀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만약 당신이 이렇게 해주면 나는 이렇게 할께” 등의 협상을 계속한다. 그러나 상대는 좀처럼 바뀌지 않으므로 시간이 흐르면서 우울과 절망감을 느끼는 단계다. 잘못된 선택으로 인생이 실패했다는 생각이 들면서 만사가 귀찮고, 우울, 불면, 식욕저하 등을 경험하고 깊은 상실감을 경험한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는 상대의 모습을 결국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용의 상태다. 내가 꿈꾸고 바라던 모습을 관에 넣고 땅속에 장사 지낸 후 슬피 우는 애도의 과정을 거친 후에야 지금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수용 단계에 올 때 비로소 우리는 ‘이제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란 능동적이고 구체적인 질문 앞에 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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