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레아노 정착촌 ‘엘보로’에 국민회 지부 세워
※ 광복 70돌 특별 기획
【제5편 쿠바 한인이민사의 현장 <상>】
멕시코 유카탄 반도와 플로리다 반도라는 두 개의 손가락 사이에 낀 시가를 연상시키는 쿠바는 북쪽으로는 플로리다 마이애미가 지척이고 서쪽으로는 세계적인 관광휴양지 칸쿤이 1시간 거리에 불과하다.
하지만 1세기 가까운 90여년 전 이곳에 들어와 정착한 한인 이민 선조들에게는 지구를 반 바퀴를 돌아야 하는 멀고도 먼 길이었다. 조국을 잃고 국적조차 없었던 한국인들이 멕시코 유카탄의 ‘애네켄’ 농장에서의 죽음과도 같았던 ‘노예노동’을 피해 또 다시 바다를 건넜던 쿠바에는 여전히 당시 이민 선조들의 ‘슬프디 슬픈’ 삶의 흔적이 남아 있고, 그들의 후손들이 여전히 자신을 ‘코레아노’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다.
광복 70돌을 맞아 본보는 54년 만에 미국과 국교를 정상화하고, 막 빗장을 열기 시작한 쿠바 수도 ‘아바나’를 거쳐 90여년 전 한인 정착촌이 건설돼 초기 한인이민 1세들의 삶의 터전이 됐던 ‘마탄사스’(Matanzas)를 찾아 그들의 족적을 되짚으며 쿠바의 코레아노로 살아가고 있는 한인 후손들의 삶을 취재했다.
■쿠바 한인 이민사의 시작
1921년 3월11일 쿠바 마나티 항구에 도착한 한인들은 지옥과도 같았던 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에네켄’ 농장을 벗어난 288명이었다. 이들 중 94명은 1905년 인천 제물포항을 떠났던 1세들이었고, 나머지는 멕시코에서 태어난 그들의 자녀들이었다.
1905년 4월4일 1,033명(남자 802명, 어린이 포함 부녀자 231명)의 조선인들은 멕시코에 가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일본 이민 브로커 업체 ‘대륙식민합자회사’의 모집광고를 보고 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에네켄 농장으로 건너가 노예노동에 시달렸다. 쿠바의 첫 이민선조들은 바로 그 노동자들과 그들의 자녀들이었다.
유카탄 반도 북부에 있는 ‘메리다’(Merida)에서 무더운 날씨와 열악한 환경, 에네켄 농장의 가혹하고 비인간적인 노동에 시달리다 ‘부채 노예’의 사슬에서 벗어난 이들 중 288명이 새 삶을 찾아 쿠바를 찾은 것이었다.
하지만 아바나에서 동쪽으로 약 700km 떨어진 마나티 항구에 도착한 한인 288명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또 다른 고단한 여정의 시작이었다.
■“우리는 일본인이 아니다”
‘그래도 멕시코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희망을 안고 쿠바 마나티 항에 도착한 이들의 시작은 처음부터 불길했다. 마나티 항국에 도착하자마자 이들을 기다린 것은 ‘나라를 잃은’ 망국인의 설움이었다.
조선이 일본에 합방되기 전까지만 해도 멕시코 ‘에네켄’ 농장에서 일부 한인들이 농장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탈출을 시도하거나 자살을 하는 일이 속출하고, 탈출하다 잡혀 가혹한 형벌을 받는다는 참상이 알려지자 조선 정부가 실태 파악에 나서기도 했지만, 나라를 잃은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관심을 가져줄 정부는 없었다. 물론 당시 조선 정부는 속수무책이었다. 윤치호를 멕시코에 파견했지만 윤치호는 멕시코에 가지도 못한 채 하와이에서 돌아오고 말았지만, 마나티에 도착한 이들에게 관심을 갖거나 보호를 해 줄 정부는 없었다.
1921년 3월11일 증기선을 따고 사탕수수 노동자로 쿠바 마나티 항구에 도착했지만 288명의 한인들은 무려 17일간 배에서 내릴 수 없었다. 바로 국적 문제 때문이었다. 1905년 멕시코를 향할 당시 만해도 조선의 국적을 가지고 있었던 이들은 조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자 공식적인 이민서류도, 공식적인 국적도 없는 떠돌이 무국적자로 쿠바에 도착하게 된 것이다.
당시 마나티 항에 도착한 한인 288명은 ‘일본인임을 인정하라’는 쿠바 이민관리들의 요구를 거절, 17일간 배에서 내릴 수 없었다. 이들은 당시 ‘일본인으로 인정받느니 차라리 무국적자로 남겠다’며 17일간을 버티다 마침내 ‘코레아노’임을 인정받고 쿠바 땅에 첫 발을 내디딜 수 있었다.
■마탄사스 엘보로(El Boro) 한인 정착촌
“여기 엘보로(El Boro)에 1921년 이민으로 온 대부분이 쿠바 유일의 전통 한인촌을 이루어 살면서 에네켄 수확에 힘쓰는 한편 고국의 역사와 언어를 가르치는 한국학교를 세우고 교회와 한인회를 설립하여 우리의 전통문화 계몽을 위해 노력했다. 이들 후예들이 이 귀중한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고 보존하기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게 되었다”
이 글은 1921년 멕시코에서 쿠바로 건너 온 이민 1세들이 정착한 항구도시 ‘마탄사스’에서 약 4Km 떨어진 외딴 마을 ‘엘보로’ 입구에 세워진 ‘한국인 기념비’(Memorial Coreano)에 새겨진 비문으로, 이 기념비가 세워진 곳은 90여년 전 이민 1세들이 피땀을 흘렸던 ‘에네켄’ 집단농장이 있던 자리이다.
‘일거리도 많고, 사탕수수 농장은 임금도 많이 준다’는 말을 믿고 쿠바에 도착했지만 한인들의 현실은 희망과 달랐다. 한인들이 쿠바에 도착한 1921년부터 설탕 값이 폭락해 쿠바 경제가 휘청거렸고, 쿠바인들의 삶은 비참했다. 사탕수수 농장에서는 일자리를 구하기 힘들었고, 어렵게 일자리를 구해도 에네켄 농사 밖에 몰랐던 한인들은 결국 실업자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암담한 생활이 계속되자 마나티에 도착한 지 2개월 만에 한인들은 익숙한 ‘에네켄’ 농장을 찾아 터전을 서쪽으로 옮겨야 했다. 마나티를 떠나 찾은 곳이 바로 수도 아바나에 인접한 마탄사스의 엘보로 마을 ‘에네켄’ 농장이었다.
마나티에서 서쪽으로 약 580km, 수도 아바나에서 동쪽으로 약 120km 떨어진 이곳은 마탄사스 도심에서 떨어진 외딴 마을로 대중교통 수단이 없어 접근하기가 쉽지 않은 곳이다. 아바나에 천신만고 끝에 구한 1950년대 소련산 ‘라다’ 승용차는 가는 도중 5차례나 말썽을 일으켜 아바나를 출발한 지 4시간 만에야 엘보로 마을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멕시코를 떠나면서 ‘더 이상 에네켄’을 만지지 않겠다고 결심했지만 한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다시 에네켄을 자르는 일뿐이었다.
쿠바 한인 이민 1세로 대한인국민회 쿠바 지부를 이끌기도 했던 독립운동가 고 임천택씨의 딸이자 쿠바 한인사회의 대모로 불리는 마르타 림(76)씨는 당시 엘보로 마을 에네켄 농장에서의 한인들의 삶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들은 매일같이 새벽 4시에 일어나 오후 5시에 일이 끝나는 고된 나날을 보냈다. 찌는 듯한 무더위 속에 하루 종일 고된 농장 일을 마치면 아버지, 어머니는 또 다시 식당에서 음식을 만드는 일에서부터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했다.”
엘보로 마을은 헛간 형태의 집 10여채가 모여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한인들이 살던 집들은 기본적 시설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전기도 상수도도 없었다. 벌판 북쪽에 있는 우물에서 물을 길어왔다.
하지만, 이곳 엘보로는 쿠바 한인들의 가장 중요한 본거지였다. 여기서 국민회 청년단, 여성회가 생겨났다. 전통악기에 맞추어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전통음식이 일상 식탁과 명절날에 올라왔다. 일본의 압제로부터의 해방과 조국에 대한 것들이 일상사와 함께 주된 대화 주제였다. 대한인국민회 쿠바 지부(Korean National Association of Cuba)가 자리를 잡은 곳이기도 했다.
현재 이 마을에는 90여년 전 한인들이 학교와 교회로 사용했던 건물이 폐허가 되다시피 한 상태로 남아 있지만, 이곳이 한인들의 흔적은 찾기 힘들었고, 마을 입구에 세워진 한인 기념비만이 이곳이 과거 한인 정착촌이었음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마르타 림씨는 “초창기에 독일계 농장 주인은 에네켄 잎을 세척하는 기계가 설치되어 있었던 창고를 주거용으로 내주었고 나중에 한인들에게 엘보로 동남쪽 외곽에 허술한 집들을 제공해 주었다”며 “한인들이 이곳에서 에네켄 농사를 짓던 모습을 여전히 기억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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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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