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엠파이어 스테이트 인근 24시간 영업 인기
▶ 최근 고용불황에 2세들 대물림 증가 추세
맨해턴 K-타운의 커피샵에서 만난 조원진씨 가족.
식당, 커피샵, 가라오케가 몰려있는 맨해턴 32번가 한인타운은 24시간 영업하는 곳이 많아 밤새 불야성을 이룬다.
※ 광복 70돌 특별 기획
【제6편 미국 최대 도시 뉴욕에 가다】
과연 미국의 심장이다. 아침 9시, 맨해턴의 거리는 코너마다 지하철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거리를 메웠다. 어깨를 부딪쳐도 익스큐즈 미 한마디 없는 무뚝뚝한 인파는 빠른 걸음으로 사방 마천루의 거리속으로 흩어져간다. 꼼짝없는 트래픽, 지하철 환풍기에서 올라오는 더운바람, 밤낮을 가리지 않고 번쩍이는 디지털 빌보드, 그 사이사이 조금은얼빠진 모습으로 카메라를 들이대는 관광객들… 세계의 상업, 금융, 미디어, 예술, 패션, 건축의 중심지인 뉴욕 맨해턴의 거리는 마치 메가톤급 기계가 역동적으로 돌아가는 거대한 엔진과도 같았다. 미국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도시(2011년 총 824만4,910명),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170여개 언어가 사용되는 도시, 5,538채의 고층빌딩이 솟아 있고, 24시간 잠들지 않는 세계 최대의 지하철 망, 글로벌 금융의 40%를 좌지우지하는 세계 경제의 수도이며 세계 문화의 수도, 2,000개 이상의 예술문화 단체와 500개 이상의 아트 갤러리가 있는 도시… 거대한 메트로폴리탄 뉴욕에서는 한국인 이민자들의 숨결도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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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뉴욕에 거주하는 한국계는 14만명(0.7%).
그러나 이것은 센서스 자료일 뿐 실제 한인인구는 30만~40만명이 될 것으로 한인사회는 추정하고 있다.
뉴욕의 한인 발자취는 100년이 넘는다. 뉴욕과 필라델피아를 비롯한 미 동부 지역에 첫 발을 내디딘 한국인 중 유명한 사람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과 서재필 박사가 있다. 서재필 박사는 1885년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후 동부로 옮겨와 1890년 한국인 최초로 미국 시민권을 받았다. 이승만 박사는 1904년 미국에 도착해 조지 워싱턴 대학에서 학사, 하버드에서 석사,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처럼 20세기 초 미 동부에 거주한 한국인은 대부분 훗날 한국으로 돌아가 정치·사회적 지도자가 된 엘리트 지식인들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현재의 2세와 3세대로 이어지는 이민역사는 1950년대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초창기 1950~60년대에는 유학생과 지상사 주재원 등이 약 1,000명 거주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다 68년 이민개정법이 통과된 후 70년대부터 이민자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한인사회가 본격적으로 형성됐고, 80년대까지 매년 수만명씩 들어와 뉴욕 한인사회가 크게 발전했다.
80년대는 뉴욕 한인사회의 황금시대로서, 한때 브로드웨이에 한인상가가 200개를 넘어섰고 32가를 중심으로 식당을 비롯해 수퍼마켓, 선물가게, 서점, 의류점, 여행사 등이 잇달아자리 잡았다. 그러나 90년대 들어서 미국 경제가 불황에 빠지자 한인 상권도 위축됐고, 이때부터 이민자보다는 유학생, 지상사원 등이 많아지면서 상권 역시 새롭게 변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 이후 한인사회의 정치력 및 권익신장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2세 자녀들이 정치, 경제, 예술, 미디어 등 각 분야 주류사회로 진출함에 따라 이제는 곳곳에서 자랑스러운 한인들의 활약상을 들을 수 있게 됐다.
2015년 현재 뉴욕은 어디서나 한국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다. 맨해턴에만 7개 매장이 있는 ‘파리 바게트’는 아침마다 출근길에 빵과 커피를 사려는 사람들이 긴 줄을 서고 있었다. 한국인 셰프가 운영하는 유명식당 ‘모모푸쿠’와 ‘단지’는 손님 대다수가 타인종들이었다. 식당에서는 요즘 한창 유행하는 한국 아이돌들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가장 놀라운 곳은 맨해턴의 한인타운 32번가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의 뒷길, 짧은 한 블락에 형성된 한인상권은 언제나 한인보다 외국인들이 바글바글하다. 식당, 커피샵, 가라오케, 기프트샵 등이 몰려 있는 이 거리는 24시간 업소가 많아 타인종 젊은이들의 파티장소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강남처럼 밤새 불야성을 이루는데 뉴욕에 그런 거리가 없으니외국인들이 맛을 들여 찾아온다고한다.
뉴욕의 한인 비즈니스는 네일샵이 주종을 이룬다. 맨해턴 전역과 롱아일랜드에 퍼져 있으며 약 8,000명이 종사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지난 5월 뉴욕타임스가 각종 노동법 위반사례와 종업원 착취, 차별 등을 고발한 기사로 철퇴를 맞았다.
그 외 세탁소, 델리, 식당이 많고, 요즘은 2세들이 가업을 이어받는 추세를 보인다. 많은 2세들이 월가의 금융계를 비롯한 주류사회에 진출하고 있지만, 아이비리그를 나와도 취직 못하는 젊은이들이 많아 부모 사업에 뛰어든다는 것이다. LA와 크게다르지 않은 사정이다.
뉴욕의 한인들은 맨해턴보다 퀸스와 롱아일랜드, 북부 뉴저지에 가장 많이 살고 있다. 퀸스에서는 플러싱과 베이사이드에 한인타운이 형성돼있고, 롱아일랜드에도 많은 수가 살고 있으며, 북부 뉴저지의 한인타운도 규모가 꽤 크다.
이곳 한인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한국 사람이 모여 사는 동네는 다 비싼 곳이다. 또 갈수록 이민자가 많아지기 때문에 렌트비와 집값이 계속 오르고 있다.
렌트비는 지역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지하철역이 가까운 곳일수록 비싸고, 퀸스의 경우 1베드룸 아파트가 1,900~2,000달러선, 2베드룸 콘도는 45만달러에서 70만~80만달러 정도라고 한다.
이곳서도 중국계 큰 손 투자가 많고 부동산 현찰 구입이 많아 집값을 올리는 요인이 되고 있다고 현지 한인들은 전했다.
■“다양성이 장점, 예술가들에 최고의 도시예요”- 클라리넷 연주자 조원진씨
“다양성이 가장 좋은 점이죠. 인종도 그렇지만 문화와 언어가 정말 다양하고, 특히 예술적으로 다양한 경험할 수 있는 곳이 뉴욕입니다”
브롱스에 거주하는 클라리넷 연주자 조원진(35)씨는 한국 예종과 서울대 음대 대학원을 나와 USC에서 졸업수료(Graduate Certificate) 프로그램, 예일대 음대에서 석사와 아티스트 디플로마를 마치고 뉴욕에서 카네기홀 펠로십 프로그램을 수료했으니 한국과 LA, 코네티컷, 뉴욕의삶을 두루 경험한 음악인이다.
현재 프리랜스 연주자로 다양한 공연단체에서 활동하는 조씨는 자기 계발과 끊임없는 발전적 삶을 위해서는 뉴욕이 최고라고 예찬론을 편다.
“LA는 날씨가 정말 좋고, 인앤아웃 햄버거가 그리운 곳이죠. 여유도 있고 살기는 정말 좋은데 예술가로서는 뉴욕만한 자극을 주는 도시가 없다고 봅니다.
특히 연주자에게는 오케스트라 공연뿐 아니라 춤, 오페라, 뮤지컬에서 모두 연주할 수 있고, 현대 창작곡을 초연하는 기회가 많아서 음악적으로 늘 새로운 도전과 함께 활동할 수 있는 곳이에요. 또 사람들이 그런 음악을 인정하고 인조이하는 것도 뉴욕만이 가진 장점이라고 봅니다”
그의 아내 미진(34)과 딸 하늘이(5)도 뉴욕 생활에 100% 만족한다고 말한다.
“처음 뉴욕에 왔을 땐 사람이 너무 많고 복잡하고 지저분하고 생활비도 비싸서 좋은지 몰랐어요. 하지만 살다보니 편리한 점이 많고, 무엇보다 공립학교 시스템이 좋아서 애들 키우기에 나쁘지 않은 곳이란 생각이 듭니다.
브롱스에서 학군 좋은 리버데일로 이사했는데 조용하고 살기 좋고, 지하철 타면 금방 맨해턴의 박물관들과 공원에 갈 수 있어서 아이들 정서문화 교육에 뉴욕보다 좋은 곳이 있을까싶네요”
<
글·사진 정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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