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를 맞아 집에 온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잠이 깨어 기분 좋은 새해의 아침을 맞이했다. 지난 밤 내내 두 형제가 거실에 마주 앉아 두런거리더니 새벽녘까지 게임을 하고 놀았는지 식탁 위에는 빈 맥주병과 먹다 남긴 음식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모처럼 아이들의 야식을 준비해 주느라 신이 났을 아내는 거실의 소파 한 켠에서 쪽 잠을 청한 듯 작은 담요 한 장이 거실 바닥에 아무렇게나 접혀져 있다.
아이들이 대학으로 떠난 후 늘 모델 하우스 같이 잘 정돈 되어 있던 집안 곳곳은 폭격을 맞은 듯 어수선 하지만 오히려 휑하게 비어있던 공간에 따뜻한 기운이 가득 채워진 듯한 느낌이었다. 언젠가 두 아이가 결혼을 하고 나면 이런 풍경에도 변화가 올 것이니 오늘 본 이 정겨운 풍경을 기억의 깊은 곳에 새겨 두기로 한다.
요즘은 사람들과 마주 앉으면 얼마 전 방영한 드라마 '응답하라 1988' 로 화제가 옮겨간다. 방영 시간도 모른 채 TV를 켜다 우연히 보게 되었으니 순서도 없이 토막극으로 보는 거였지만 전개되는 내용이 낯설지 않은 것은 지나온 우리의 삶이 그대로 보여 지는 시대 배경에 충분히 공감이 되었기 때문이리라. 드라마 속 골목에 사는 정 많고 착한 사람들이 지금은 사라져 버리고 없는 것들에 관해 쏟아 놓는 이야기는 다름 아닌 그리움이었고, 드라마 작가의 의도까지 잘 알 수 없지만 드라마에 나오는 낯익은 인물들이 때로는 내 누이와 형제의 모습이 되어 친근하게 다가왔다. 바쁘다는 핑계로 나와 내 가족 외에는 눈 돌릴 여유조차 갖지 못하고 살다보니 앞집, 옆집에서 가족 같은 이웃으로 함께 사는 드라마의 골목 안 사람들의 모습에 위로가 되었던 듯싶다.
그동안 우리가 놓쳐버린, 아니 어쩌면 힘든 경쟁 속에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포기 했을지도 모를 공동사회를 그리워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드라마를 보는 동안 삼십년 전의 나를 돌아보니 떨리는 손으로 얄팍한 월급봉투를 건네주며 미안해하는 남편이 불려 나왔고, 알뜰하게 아껴 쓰며 몇 장의 지폐를 남겨 내 뒷주머니를 부자로 만들어 준 아내가 곁에서 웃고 있었다. 또 맏이라는 이유로 당연하게 누리던 특별한 대접에 군말 없이 따라 주던 너그러운 동생들이 반갑게 마주 앉아 있었다. 시인 흉내를 내며 노트에 휘갈겨 써 넣던 글 한 줄도, 눈물짓던 시절까지도 모두 추억이란 이름으로 남아 있음이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 에 나오는 주인공의 독백은 그래서 더 오랫동안 마음에 남는다. '그 시절이 그리운 건, 그 골목이 그리운 건, 단지 지금보다 젊은 내가 보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 곳에 아빠의 청춘이, 엄마의 청춘이, 친구들의 청춘이, 내 사랑하는 모든 것들의 청춘이 있었기 때문이다....(중략)
다시는 한데 모을 수 없는 그 젊은 풍경들에 마지막 인사조차 못한 것이 안타깝기 때문이다. 이미 사라져 버린 것들에 뒤 늦은 인사를 고한다.' 또 다시 30년 쯤 후, 빚진 세월을 모아 곱게 기운 옷 한 벌 만으로도 오늘을 추억하며 따뜻해 질 수 있을 것 같다. 노랫말도 곡조도 반쯤은 잊어버린 그 시절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언젠가 추억이란 이름으로 응답할 2016년을 아름답게 시작한다.
아름다운 꿈 깨어나서 하늘의 별빛을 바라보라/한갓 헛되이 해는 지나 이맘에 남모를 허공 있네-'꿈길에서' 중에서- "재미동포를 위한 한국어 교육에 앞장서시고 평생 동안 아름다운 꿈을 꾸며 살아오신 허병렬 선생님을 생각하니 곧바로 떠오르는 노래가 바로 이 곡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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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선 (전 커네티컷한인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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