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1학년 때 내 장래희망은 의사였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코웃음을 칠 일이다. 적성이 100% 문과 쪽에 가까운 내가 어찌하다 그런 희망을 품었었을까? 아마 막연히 그럴듯하게 들리는 직업, 수입, 사회적 지위 등을 생각해서 고른 것일 게다.
그러다가 2학년 때 문과와 이과 중 선택할 때 당연히 문과로 가면서 전공을 고민했다. 특별히 하기 힘든 공부들 예를 들어 물리, 화학, 수학을 빼고 나니 할 것들이 많지 않았다.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것들 중 하나는 글쓰기였다. 백지 한 장 주고 주제를 주면 고민을 하긴 하지만 그리 힘들지 않게 글을 써서 채울 수 있었다.
그래서 글을 쓰면서 살 수 있는 괜찮은 직업을 찾았고, 골방에 앉아 글만 쓰기는 싫었던 나는 카피라이터라는 직업을 알아내어, 결국엔 그 직업을 갖게 되었다.
의사에서 카피라이터라니, 엄청난 점프였다. 내가 이상으로 생각한 것은 사실 라이센스를 가진 전문직이었으나, 내 정서로는 감당할 수 없는 분야임을 깨닫고 현실을 바라보게 된 최초의 과정이었을 것이다.
살면서 종종 이렇게 이상과 현실사이에서 서있는 나를 발견한다. 대학 때부터 쭉 나는 진보주의자였다.
데모에도 종종 참여했고, 나라를 쥐고 흔드는 무식한 권력을 증오했으며, 빈부의 격차를 줄이는 것에 관심이있었고, 힘에 따라 지역의 발전이 달라지는 것에 화를 냈었다.
농촌 봉사활동을 가서 뙤약볕 아래 쪼그리고 앉아 밭에 난 잡초를 뽑으며 가난한 농부들의 삶을 경험했고, 장난감 없이 노는 아이들과 놀이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케케묵은 사회의 부조리를 바꾸는 것은 도전하기 힘든 이상일 뿐이었다.
당장 나는 취업이 절실했고, 원하는 직장에 들어가 그럴듯한 사회생활을 하고 싶었다. 그 꿈을 이루는 것이 사회 변혁이라는 이상보다 더 급했던 게 내 현실이었다.
부자들은 당연히 그 부를 나눠야 한다고 외쳤던 내 20대의 목소리는 지금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이제는 “일하지 않고 오직 웰페어에만 기대려는 사람들에게 돈을 주는 것이 반드시 좋은 정책은 아니다”로 바뀌었다.
“왜 여자들은 가정과 일을 선택하려 하는가, 일은 필수다!” 소리 높여 여성학 시간에 토론하던 나는 “아이를 위해 일을 포기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로 바뀌었다.
인터넷에서 재미로 해본 ‘나는 보수주의인가 자유주의인가’ 퀴즈 결과 나는 중도보수로 나온다. 이런, 세상을 향해 핏대를 세우던 내가 어느새 이도저도 아닌 중간이 된 것인가.
어쩌면 나는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모두가 행복한 사회를 만들 수는 없을까, 생각하면서도 시급이 15달러로 오른다는 기사를 보면 스몰비즈니스들이 직원을 줄이겠구나 걱정도 된다. 불체자들의 불안을 마음으로 안타까워하면서도 정부 돈이 그쪽으로 빠지는 것에는 반대한다.
나의 이상은 여전히 멀리 있고, 현실은 땅에 단단히 스며있다. 이상은 ‘일을 잘해서 사회적으로 성공한 커리어우먼이자 아이도 잘 키워낸 수퍼맘’이었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상은 올해는 매달 책을 한권씩 읽고 그림을 하나씩 끝내는 것이었으나 3개월이 지나는 지금, “어머, 벌써 4월이네” 하고 있을 뿐이다.
어젯밤 공화당 대통령 선거 후보지명전에 출마한 후보 중 한명의 얘기를 라디오로 들으며 과연 이상과 현실이 얼마나 먼지, 그 폭은 어느 쪽을 향해 좁혀질지... 궁금함과 걱정이 오간다. 이상은 멀고, 현실은 가까우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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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민 카피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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