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세월 속에서 많은 친구들이 스치고 지나가거나 옆에 머물러 있게 된다.
성실히 사는 노동자, 상인, 대학교수, 부유하거나 가난한 사람, 목사, 연예인, 문학가, 언론인, 정원사…내 삶의 어느 지점에서 만났던 수많은 친구들은 각기 다른 직업과 외모와 특성으로 참 다양했다.
얼마 전 9시간 이상을 운전하여 그중 한 친구를 찾아갔었다. 멕시코 원주민 청년이었다. 내가 의료봉사를 시작하던 무렵 그를 처음 만났을 때는 20대 초반의 풋풋한 청년이었는데 이제는 30대 중반이 되었다. 오랜 동안 그는 우리 봉사팀의 동역자로서, 성실한 친구로서 함께 땀을 흘렸었다. 낯선 땅에서 우리 팀에게 수없이 닥쳐왔었던 어려움을 그는 같이 헤쳐 나갔고 특히 신체적으로 힘든 일들은 건장한 그가 도맡아 해주었다.
가끔 LA의 약속한 동행들이 떠나기 전 일정을 취소 할 때가 있었다. 속수무책이었던 내가 봉사일정을 무사히 소화할 수 있었던 것은 현지에 있는 그와 그의 친지, 친척들의 도움 덕분이었다. 한번은 끼니도 거른 채 나 혼자 10시간을 운전해 도착하니 밤 11시경, 위는 비어 있었지만 혼자 식사할 기분이 아니었다. 잠자는 그들 부부를 깨우고 식탁을 차려 함께 먹자고 권했다. 장시간 홀로 운전 후 사람이 그리워 누군가 같이 식사 해줄 사람이 필요하기도 했지만 그만큼 막역한 사이가 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최근 그가 큰 수술을 받고 다섯 달이나 병상에 있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도움을 많이 받았던 내가 이제는 찾아가 위로와 도움의 손을 내밀 때라고 생각했다. 가요에선 “내 나이가 어때서”라고 하지만 이제 내 나이엔 같이 먼 길을 떠나줄 동반자 아니 친구가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의대 동기동창인 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흔쾌히 동반을 약속해 주었다. 그는 15년 전, 현지 창고부지 무료임대 약속을 급히 받아야 해서 혼자 떠나게 되었을 때도 동반자가 되어 주었던 친구였다. 당시 봉사에 드는 재정적 부담이 버거웠을 때, 트럭 월 지불금액 500달러를 5년간 매달 체크로 보내주기도 한 그는 이런 사실이 알려지기를 원치 않았던 착한 품성을 가진 친구였다. ‘사람의 향내’를 그에게서 실감했다.
멕시코 친구에게는 위로하는 말로만이 아닌 병으로 인한 경제적 부담도 덜어주기(?) 위해 책 출판으로 생긴 대금도 챙겨 넣었다. 웬 책판 돈? 봉사 갔을 때, 시집을 사 들고 가 틈틈이 남는 시간에 읽으면서 보냈었다. 마음에 드는 시를 만나면 처음엔 그냥 좋았고 나중엔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그런 4-5년을 지내면서 문학과는 거리가 먼 의사에게도 현장의 벅찬 감정들을 표현하고 싶은 충동이 생겨났다. 나의 글쓰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광활하고 적막한 외로운 바닷가의 분위기가 글 모양새에 영향도 주었을 것이다.
그렇게 모인 글이 한권의 책으로 꾸며졌고, 지인과 올림픽 알라딘 서점의 도움으로 책 판매 대금 1만 달러가 모여졌다. 그 금액 중 반은 이곳의 참신한 불구아동 후원단체에 보냈고 나머지 반을 지참하고 동기생과 같이 떠난 것이다. 이제 문학은 자연스럽게 내 삶의 한 부분으로 녹아들어와 내 일상의 친구가 되어 피로를 풀어주고 항상 옆에 있게 되었는데 거기에 더해 적지만 이웃에게 베풀 수 있는 돈도 장만해 준 것이다.
어려움이 닥쳤을 때 같이 헤쳐 나가주는 친구, 혼자여서 외로울 때 언제든지 찾을 수 있는 친구,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을 때 말없이 같이 떠나주는 친구가 좋은 친구라고 한다. 돌이켜보면 그간 16년간의 봉사로 약간의 재물과 시간을 잃었을지는 모르나 그보다 더 값진 많은 것을 얻었다. 세 부류의 친구를 알 기회가 주어진 것도 그중 하나다.
봉사란 결코 타인만을 위해 일반적으로 베풀거나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배우며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는 따뜻한 삶의 한 양식이며 또한 “자신에게 주는 숨은 보너스가 된다”고 한다. 이 말을 절감하면서 그 혜택을 누릴 수 있었던 기회가 내게 있었음을 감사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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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청원 내과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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