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인식품점에서 사 온 울릉도 산이라는 냉이국을 먹으면서 어릴 적 어머니 손맛이 생각나서 눈물이 났다. 어머니는 짤막한 키의 여인이셨다.
동네에서 호랑이라고 소문난 홀로 되신 시어머니로부터 ‘서방 뺏긴 년’ 이라고 수모를 당하면서도 5일장 때마다 오리알 팔아 시어머니 좋아 하시던 생굴 사다가 드린 어머니였다.
가끔 아버지가 가죽구두에 금테 안경 쓰시고 오시면 좋아하시던 어머니. 떨어져 살아도 아버지 생일이면 밤새도록 생일 음식 만들어 큰아들 등에 지우고 생일상 차려주려고 가시던 어머니. 여자의 몸으로 감당하기 쉽지 않은 밭농사였는데 삶은 콩 섞은 아침여물을 잔뜩 먹은 소를 앞세우고 밭으로 일하려 가시면서도 밝은 표정이시던 어머니. 저녁이면 들기름 등잔불 밑에서 구멍 난 내 양말 꿰매시던 그 어머니가 눈 감으면 지금도 어른거린다.
한 달에 한 번씩 시주 오시는 스님께 드릴려고 밥 지을 때 마다 한줌씩 떼어 모으시던 어머니의 믿음. 16살이던 나에게 옷 두벌과 쌀 반말을 등에 지워 집을 떠나보내면서 앞산의 서낭당을 향해 엎드려 “우리 작은아들 무사히 빨리 집으로 돌아오게 하소서"라고 빌던 어머니. 아직도 어린 나를 왜 집을 떠나게 하셨는지 어머니의 참뜻을 지금도 알 수가 없다
1991년 미국 연합감리교회 목사님들 방북단에 동참해 40년 만에 고향에 갔었는데 어머니는 1978년에 돌아가셔서 대동강이 내려다보이는 우리 집안 선산에 묻혀 계셨다. 불효를 참회하면서 많이 울었다. 그러면서 나도 죽으면 집안 선산 어머니 묘소 옆에 묻히고 싶다고 생각했다. 3일 동안 고향집에 있을 수 있었는데 70년 전에 어머니가 쓰시던 부엌 살림살이가 그대로이고 안방의 벽시계도 여전히 돌아가는걸 보면서 살아계실 때의 그 어머니가 더욱 그리웠다.
2년전 박근혜 대통령이 “통일은 대박이다”라고 해서 무슨 통일에 대한 묘책이 있는가보다 했었는데 쪽박이 아니기를 빌지만 금년 들어서 남북 관계가 고양이와 개 사이로 변해가는 것을 보면서 “코를 비틀면 피가 나오듯 화를 돋으면 분쟁이 일어난다"는 성경 잠언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걱정스러워 침상에 누워도 잠못자는 밤이 많아진다.
이제 내 나이 80이 넘었는데 선산 어머니 곁에 묻히기는 틀렸구나 생각되어 이제 이국땅이지만 이곳에 장지를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김재숙 전 워싱턴 평통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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