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1일 페어팩스 카운티의 헌던 고등학교에 들렀다. 약 400명의 시민권 취득자 선서식이 열린다고 해서였다. 그런데 시간을 잘못 알아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선서식이 끝난 후였다. 그래도 많은 새 시민권자들의 상기된 모습과 여기저기에서 시민권 증서와 꽃다발을 안고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시민권자의 특권이면서 책임인 투표권 행사를 위해 유권자 등록을 하는 것도 보았다.
같은 날 오후 또 다른 고등학교에서 암 퇴치 연구기금 모금 행사가 열렸다. 그 곳에서 동료 교육위원이 시민권 선서식에 다녀온 소감을 물었다. 미국에서 태어난 동료는 나 같이 외국 출신자들이 미국시민권을 취득하면서 느끼는 감정이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자연스럽게 내 경우를 얘기해 줄 수 있었다.
나는 로스쿨에 재학 중이던 1983년에 시민권을 취득했다. 미국에 온지 9년 정도된 때였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던 나의 미국 이민은 결코 내가 원했던 바가 아니었다. 모든 결정은 부모님이 내리셨다. 사실 내 나름대로는 불만이 있었다. 왜 조국을 버리고 다른 나라로 가느냐. 한창 사춘기에 친구들을 두고 떠나는 것도 좋을 리 없었다.
미국의 이민사를 보면 ‘일시체류자’라는 뜻의 ‘sojourner’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유럽에서 미국으로 온 사람들의 상당수가 미국에 잠시 체류한다고 생각했었다. 모두 사정이 있어서 미국으로 왔지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후 고국으로 돌아가겠다는 생각을 하고 살아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고국으로 돌아간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대다수는 미국에 그대로 정착하고 말았다.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고 가정을 꾸리거나 고국에 두고온 나머지 가족들을 미국으로 불러들였다.
나도 공부를 마치면 고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어렸기에 바로 돌아갈 입장이 못 되었지만 학업을 마치고 어느 정도 준비가 되면 그렇게 하겠다고 생각했다.
고국에 돌아가면 나의 소신을 펼칠 수 있는 길도 열릴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사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결국 나도 이전의 유럽출신 이민자들과 마찬가지로 시민권을 취득하고 정착하게 된 또 한 명의 이민자 출신 미국시민이 되어 버린 것이다.
동료 교육위원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이민자가 자신이 태어났던 국가의 국적을 포기하고 다른 나라의 시민권을 취득하는 결정을 그냥 가볍게 내리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그들의 고뇌를 이해해 주고 그러한 시민권자들을 따뜻하게 품어야 한다. 요즘처럼 이민자들을 보는 시각이 곱지 않은 때일수록 더욱 그래야 한다.
사실 미국에서 태어나 자동적으로 미국시민이 된 사람들 보다 자신의 출생국가 국적을 포기하며 미국 국적을 취득한 사람들이 어쩌면 좀 더 진정한 의미의 미국 시민인지도 모른다. 그들의 미국 시민권 취득 결정에는 자신의 의지가 담겼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번 대통령 선거 캠페인 중 드러나고 있는 이민자들에 대한 배타적 정서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깨달아야 된다. 이민자의 나라 미국에서 결코 있어서는 안될 일이다.
백인 이민자들과 달리 피부색이 다른 우리 한인들은 이민자이든 미국 태생이든 상관없이 이방인으로 여겨지기 십상이다. 그래서 주류사회 진출에 더욱 노력해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다. 새 시민권자들에게 축하 인사드린다. “잘 하셨습니다. 미국태생 시민들에게 절대 꿀리지 마십시오. 그리고 꼭 투표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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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일룡/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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