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드로 윌슨은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정치학 박사를 한 그는 1910년까지 프린스턴 총장을 역임한 후 바로 정계에 뛰어들어 같은 해 뉴저지 주지사에 선출됐으며 불과 2년 뒤인 1912년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다. 미국에서 대학 총장 출신이 대통령이 된 것은 그가 처음이며 남부인 출신이 대통령이 된 것도 1848년 재커리 테일러 이후 처음이다.
그는 집권 후 진보주의의 기수답게 진보적 정책을 지속적으로 펴나갔다. 미국의 금융과 통화 정책을 연방 정부의 통제 하에 둔 ‘연방 준비 은행법’, ‘연방 통상위원회 법’, ‘클레이튼 반트러스법’, 부자에게 중과세를 물려 빈부 격차를 줄이겠다는 ‘국세청법’이 모두 그가 만든 것이다. 수정 헌법 19조를 밀어붙여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하는데 앞장 선 것도 그다. 그는 1차 대전이 끝난 후 ‘국제 연맹’을 창설했으며 그 공으로 1919년 미 현직 대통령으로는 두 번째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그러나 과한 업무 탓인지 1919년 9월 25일 콜로라도 푸에블로에서 베르사유 조약 지지 연설을 하던 중 그는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회복되지 못한 채 10월 2일에는 심한 뇌졸중까지 겹쳐 반신불수 상태가 된다. 이런 사실은 그의 아내와 주치의만 아는 극비였다. 대통령과의 모든 접촉은 아내를 통해서만 가능했고 몇 달 동안 국정에 문외한인 윌슨의 아내가 국가의 주요 결정을 내리는 상황이 벌어진다.
부통령이 그의 직무를 대신하기 위해서는 아내와 주치의를 비롯한 대통령의 최측근이 대통령이 직무 수행 능력을 상실했다고 증언해야 하는데 아무도 이를 하지 않아 그가 반식물 인간 상태로 대통령 자리에 1년 이상 앉아 있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대통령 유고시 대통령 직 승계 절차와 순위를 정한 수정 헌법 25조는 윌슨의 급환 때문에 제정된 것이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힐러리 클린턴이 지난 주말 9.11 추모식에 참석했다 넘어질 뻔한 사건을 두고 대통령 후보의 건강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힐러리 측은 그녀가 폐렴에 걸린 데다 탈수와 더위를 먹는 바람에 그렇게 됐다며 지금 빠른 속도로 회복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많은 미국인들은 그 말을 믿지 않고 있다. 바로 직전까지 힐러리의 건강 문제가 제기될 때까지 만 해도 힐러리 진영은 이를 일고의 가치도 없는 낭설이라고 우겼기 때문이다.
일반 사람의 건강은 개인 프라이버시의 문제지만 정치인, 특히 대통령 후보의 건강에 관한 정보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사실상 대통령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정도의 질병이 있는데도 이를 감추고 출마해 당선되는 것은 국민을 상대로 사기를 치는 것과 다름없다. 특정 후보의 자질과 정책을 보고 표를 줬는데 건강 이상으로 공약을 실천하지 못한다면 이는 허위 광고로 상품을 판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2000년과 2004년 선거 때 아들 부시는 400페이지에 달하는 건강 기록을, 2008년 선거 때 존 매케인은 1,000페이지가 넘는 건강 기록을 공개했다. 매케인은 특히 제3자가 캠페인 측이 제공한 기록을 객관적으로 검증하게까지 했다.
힐러리는 이메일과 관련해 FBI 조사를 받으면서 2012년 뇌진탕 후 많은 부분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스스로 말한 바 있다. 이 기회에 힐러리와 트럼프 모두 건강 기록을 공개하고 제3자 검증을 받는 것이 미 유권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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