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릴때 미국 가정에 입양된 강씨 결혼 후 딸 입양
▶ 더 부모다워질 수 있는 그 길에 웃음과 감동 가득
![[신년특집] 조던 강 KCI 이사장의 입양 스토리 [신년특집] 조던 강 KCI 이사장의 입양 스토리](http://image.koreatimes.com/article/2017/01/02/20170102171627581.jpg)
입양한 딸 줄리아(오른쪽)와 조던 강(왼쪽) KCI 이사장 가족이 지난 가을 펌킨패치 농장에서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다.
한인입양인 조던 강(48) 코리안센터(KCI) 이사장은 10년전 한국에서 딸 줄리아를 입양했다. 결혼 후 두 아들이 이미 출생했지만 오랜 시간 마음속에 품어왔던 입양의 꿈을 마침내 이룬 것이다. 그것은 마치 신에게 끝없이 서원한 맹세를 실천하는 떨리는 절차이기도 했고, 또 자신도 누군가에게 받은 사랑을 전해야 하는 되갚음의 여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보다는 자신과 같은 아픔을 돌봄으로써 살아가는 이유를 찾고 싶은 열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줄리아는 14개월 때 강씨 가족의 일원이 됐다.
▲한국사람, 한국말 그리워하다
나는 7살에 미주리주 캔사스시티 유태계 미국가정에 입양됐다. 아버지는 법학 교수였고 어머니는 예술가들을 지원하는 후원자였다. 그들은 딸과 아들을 두었지만 이웃집에서 한인아이를 입양한 것에 영향을 받아 나를 입양했다. 아마도 소아마비인 아버지가 자신과 같은 나를 택한 것 같다. 그러나 아버지는 늘 바빴고 나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사고를 치는 큰 누나, 남동생과 달리 조용했던 나는 그들의 관심권에서 항상 멀리 있었다. 그런 내가 양부모와 가까워진 것은 대학에 입학할 무렵이다. 어린시절 아버지 제자인 한인 법학생을 한번 봤을 뿐 한국사람을 본 적이 없다. 애틀란타 에모리대학에 입학해서 한인친구와 함께 음식점에서 처음 된장찌개를 먹다가 몇초간 몸이 얼어붙고 말았다. 내 몸이 기억하는 그 맛은 한없이 친근해서 순간적으로 묘한 충격에 휩싸였다. 나는 대학 진학 후 적극적으로 한인커뮤니티와 가까워지려고 노력했다. 한국말이 그리워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한인교회에서 한국어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내가 가까워지려는 노력을 할수록 한인들은 나를 밀어냈다. 이곳에서 태어난 한인들은 한국말을 할 줄 모르는 나는 한인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리고 한인 여자친구와 가까워졌다가도 입양인이라는 걸림돌과 한국말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약점에 막혀 쉽사리 깨졌다. 그때와 달리 지금은 입양인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으로 변화했다. 참 반갑고 고마운 일이라 생각한다.
![[신년특집] 조던 강 KCI 이사장의 입양 스토리 [신년특집] 조던 강 KCI 이사장의 입양 스토리](http://image.koreatimes.com/article/2017/01/02/20170102171627582.jpg)
강씨는 두 아들이 출생했지만 줄리아를 10년 전 입양했다. 소피아는 줄리아 입양 후 태어났다.
▲입양은 삶의 전과정 함께하는 여정
줄리아가 6살 되던 해 나는 줄리아에게 너는 입양된 아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해주었다. 그러나 아직도 그녀의 친부모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언젠가 그녀가 궁금해 할 때 털어놓을 생각이다.
줄리아가 우리 곁에 온 이후 우리 가족은 더 단단해졌다. 두 아들과 작은 딸 소피아(5)는 자신의 환경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줄리아의 용기에 힘을 얻고 있으며 특히 소피아는 줄리아를 따르며 둘도 없는 자매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그 아이들이 빚어내는 떠들썩한 일상에 나는 행복하다. 나처럼 한인입양인으로 자란 아내도 흐뭇한 미소로 그 아이들을 바라본다.
나는 줄리아가 입양아로서 혼란스러워하지 않고 정체성을 갖고 자라도록 최선을 다한다. 8-15세 입양 청소년 대상 멘토링 프로그램 ‘커넥트-에이-키드’(Connect-A-Kid) 활동으로 그녀가 삶의 단계별로 부닥치는 문제들을 함께 풀어나가도록 지원한다. 또 산라몬 아가페교회의 한인입양인 대상 주말 한국학교에서 한국어를 배우며 또래 입양인들과 교류할 수 있도록 돕는다. 좋은 아빠에게 자상한 보살핌을 받지 못한 내가 아빠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걱정스럽지만 나는 내 아이들이 선하게, 사랑받고 사랑하는 존재로 자라날 수 있도록 노력하고 또 노력한다.
입양은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라 삶의 전 과정을 함께해야 하는 긴 여정이다. 원치 않은 혼란을 겪을 수도 있고, 한번도 가보지 못한 길을 가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더 부모다워질 수 있는 그 길에서 더 많은 웃음과 감동을 선사받을 것이다. 항상 균형잡힌 시각은 아니지만 그래도 건강한 관계에서 오는 따뜻함이 힘겨운 삶의 고비들을 넘기는 원천이 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친부모 찾는 한인입양인들 DNA 테스트해줘
첫 한국 방문시 홀트아동복지회에서 내 친부모의 행적을 찾으려 했지만 어떤 단서도 남아있지 않았다. 다만 입양페이퍼에 적힌 ‘강민석’이란 한국이름만 알게 됐다. 민석이란 이름이 친부모가 지어준 이름인지 아니면 입양 당시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이름인지도 알 길이 없다. 친부모를 찾는 내 노력은 좌절됐지만 친부모와 만나길 소원하는 다른 한인입양인들을 위해 페이스북 모임에서 친부모를 찾을 수 있는 DNA 테스트(www.23andme.com)를 제공하고 있다.
말 안해도 서로 통하는 SF한인입양인협회(AKASF) 회원들은 든든한 형제들이다. 2003-2005년 AKASF 회장으로 활동할 때 소주 토크(soju talk) 모임을 만들어 우리들이 경험한 힘겨움, 두려움, 서러움 등 깊은 속내를 풀어내면서 서로를 격려해왔다.
크로락스(Clorox) 컴퍼니 전략프로젝트 매니저로 일하는 나는 2016년초부터 KCI 이사장직을 맡았다. 가끔은 히든 아젠다(Hidden Agenda, 감춰진 목표)를 이해하기 어려울 때도 있지만 한인커뮤니티와 함께 일하는 것이 즐겁다. KCI는 2017년부터 이스트베이 지역에 ESL 클래스 개설하는 등 다채로운 사업을 펼칠 예정이다.
▲내 영혼 쉴 수 있는 한국
7살에 미국으로 입양됐지만 한국에 대해 남아있는 기억은 없다. 다만 내가 한국에서 자랐다면 지금 같은 삶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생각과 문화의 다름을 수용하는 능력을 키워주고 특히 내가 소아마비를 극복할 수 있도록 지원해준 양부모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그럼에도 3번 가본 한국은 어머니의 나라였다. 내 영혼이 쉴 수 있는 곳이었다. 내가 일시적으로 미국에 살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은퇴 후 나는 한국으로 되돌아갈 꿈을 꾼다. 그래서 우리 가족의 새해 소망은 한국어를 더 열심히 배우고, 운동을 꾸준히 하고, 이것저것 욕심내지 않으면서 삶을 단순하게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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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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