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저 젤라즈니의 신화적 SF, 불교-힌두교 갈등의 역사 바탕
▶ 무협지·철학 같은 작품 선보여…세계의 신화와 민담 종횡무진, 한국 만화·게임·연극에도 영향
1979년 11월 4일, 이란의 이슬람혁명 당시 미 대사관 직원들이 시위대에 의해 인질로 잡히는 사건이 있었다. 그 중 여섯 명이 탈출해 캐나다 대사관으로 숨어들어갔고, 이들을 빼내기 위한 캐나다 정부와 CIA의 극비 공조 작전이 시작되었다. 이때 CIA의 탈출 전문가 토니 멘데스는 SF영화 촬영지 탐방을 핑계로 이란에 잠입한다는 기상천외한 작전을 생각해냈다.
하려면 확실하게 할 마음을 먹은 이들은 본격적으로 일을 꾸몄다. ‘스타트렉’과 ‘혹성탈출’등에 관여한 특수 분장계의 전설 존 쳄버스가 작전에 참여했고 스탠 리와 함께 ‘판타스틱 포’, ‘엑스맨’과 ‘헐크’를 만든 만화계의 전설 잭 커비가 콘티를 그렸다. 작전팀은 실제로 사무실을 차리고 판권을 사고 헐리우드에서 제작 발표회까지 했다. 이 유례없는 작전 ‘캐나디안 케이퍼’는 벤 에플렉 주연의 영화 ‘아르고’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여섯 명은 잘 탈출했지만 정작 SF 팬들은 영화가 엎어진 것에 아쉬워할 수밖에 없었으니, 바로 이 가짜영화 ‘아르고’의 원작이 작가 로저 젤라즈니의 대표작 ‘신들의 사회(Lord of Light)’(1967)였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아직까지도 영상화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신화와 종교를 SF의 세계로
‘신들의 사회’가 이 작전에 채택된 까닭은 이 소설이 불교와 힌두교에 기반을 둔 작품이라, 중동인 이란에서 촬영한다는 명분이 먹혔기 때문이었다. 1993년 한국에 처음 소개되었을 때 이 소설이 종교와 철학소설을 주로 출간하는 정신세계사에서 마치 종교서적의 하나인 듯이 출간된 것도 이 소설의 독보적인 면을 짐작하게 한다.
젤라즈니의 소설은 일면 무협소설 같고, 한편 하드보일드 액션 소설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종교소설과 철학소설 같고, 일면은 셰익스피어를 연상시키는 고전 문학처럼도 보인다. 서로 어우러지리라 상상하기 어려운 이 조합은 젤라즈니의 많은 작품에서 드러나는 특징이다.
그의 첫 장편작인 ‘내 이름은 콘래드’의 주 배경은 핵전쟁 이후 외계인이 다스리고 돌연변이들이 가득한 미래의 그리스다. 하지만 이 SF적인 미래세계는 그리스 신화세계를 그대로 연상시킨다. 젤라즈니가 다룬 신화는 이뿐이 아니다. 그는 ‘별을 쫓는 자’에서는 미 원주민 나바호족 신화를 소재로 했고, 중국 신화(악의 왕), 기독교 신화(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이집트 신화(빛과 어둠의 생물), 북유럽 신화(로키의 가면)는 물론, 크툴루 신화(고독한 시월의 밤)까지 섭렵했다.
■SF 뉴웨이브의 거장
1960년대의 작가들은 대부분 히피문화와 비틀즈 음악을 즐겼고 베트남 반전운동을 중심으로 한 청년 시위에 참여한 이들이었다. 대부분 전쟁 중에 태어났고 적당히 반체제적이었다. 그들은 전쟁 이전에 태어나 과학이 가져올 장밋빛 미래를 꿈꾸었던 옛 작가들과는 성향이 달랐다.
SF뉴웨이브는 그들을 중심으로, 계속 외우주로 향하던 SF문학을 내면의 내우주로 확장하는 운동이었다. 인류학자이기도 했던 작가 제임스 건은 “모험가도 발명가도 과학자도 아닌, 보통의 사람들”이라는 말로 이 운동을 표현했다. J. G. 밸러드는 “SF는 우주에서 지구로 내려와야 한다. 당장 우리가 만날 미래는 지구에 있다”고 말했다. 밸러드는 극한 상황에서의 인간의 심리에 집중했고 르 귄은 인류학을, 젤라즈니는 신화를 소재로 삼았다.SF에 주류 문학가들이 진출하고, 진보적이고 페미니즘적인 색채가 들어온 것도 이 즈음이다. 스필버그의 ‘AI’의 원작자이기도 한 브라이언 올디스는 그간 여성의 작품이라는 이유로 가치 절하되었던 메리 셀리의 ‘프랑켄슈타인’을 SF의 기원으로 재조명했고, 이는 지금은 거의 정설로 굳어졌다.
■SF의 영역을 변화시킨 작가
신화를 현대세계에 접목시키고자 하는 작가는 젤라즈니가 남긴 유산을 무시하고 가기 어렵다. 그래픽노블 ‘샌드맨’으로 DC코믹스 세계관에 문학과 신화의 색채를 가져온 작가 닐 게이먼은, 자신의 글쓰기 스타일에서부터 소재까지, 전면적으로 로저 젤라즈니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현대 한국 작가에게 종종 젤라즈니의 흔적이 발견된다. 1999년 제1회 김상열 연극상을 수상한 조광화 희곡·연출의 연극 ‘철안 붓다’는 ‘신들의 사회’가 원작이며, 한국 고전게임 ‘창세기전’에서 초과학을 가진 외계인들이 다른 행성에 와서 다신교의 신이 된다는 설정에서도 이 작품의 영향을 무시하기 어렵다. 만화가 이정애가 그린 부처와 예수의 현신이 전쟁을 벌이는 ‘열왕대전기’도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고, 만화가 유시진의 ‘폐쇄자’에도 ‘앰버 연대기’의 세계가 엿보인다.
젤라즈니는 다소 젊은 나이였던 58세에 죽었다. 그가 죽자 오랜 친구였던 ‘왕좌의 게임’의 원작자 조지 R.R. 마틴은 “그의 소설을 보았을 때 전율했고, 이제 SF가 더 이상 이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며 추모했다. 닐 게이먼을 비롯한 동료 작가들은 ‘환상의 왕(Lord of the Fantastic)’이라는 이름의 추모선집을 그에게 헌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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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영 SF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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