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계와의 소통이란 가능한가
▶ 인간 인식의 근본적 한계 성찰
서구서 높이 평가된 폴란드 작가
사고실험·철학으로서 SF 추구
스타니스와프 렘의 ‘솔라리스’
1970년대 중반, 미국SF작가협회의 작가들이 양 편으로 나뉘어 격렬하게 논쟁을 벌인 일이 있었다. 그 중에는 격분해서 협회를 탈퇴하는 이까지 나왔다. 이들이 대립한 이유는 명예회원 자격을 준 어느 외국 작가가 그런 대우를 반기기는커녕 미국 SF를 신랄하게 비난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SF가 통속과 자본에 물들어 타락했으며 그 중심에 미국 SF가 있다고 봤다. 필립 K. 딕 말고는 미국에 주목할 만한 SF 작가가 아무도 없다고도 했다. 이렇듯 거침없는 비판을 쏟아 낸 사람은 폴란드의 작가 스타니스와프 렘이었다. 그의 발언이 영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부풀려지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그가 서구 SF문학을 못마땅해 한 것은 사실이었다.
■인간은 우주를 이해할 수 없다
렘의 입장은 그의 대표작 ‘솔라리스’를 보면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이 작품에서 그는 서구의 SF작가들과는 차원이 다른 심오한 인식론적 고찰을 펼치고 있다.
주인공은 솔라리스라는 외계 행성의 탐사기지로 파견된다. 그 행성의 거대한 바다는 하나의 생명체로 추정되지만, 커뮤니케이션을 하려는 온갖 시도에도 불구하고 전혀 반응이 없었다. 그런데 주인공이 도착해보니 탐사기지에 있던 사람들이 죄다 정상이 아니다. 게다가 그에게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일들이 연달아 일어난다. 솔라리스의 바다는 과연 지구인들에게 어떤 ‘접촉’을 해 온 것일까?
이 작품을 일독하고 나면 우주를 향한 인간의 사유에서 인간중심주의가 갖는 한계를 절감하게 된다. 인간은 과연 우주를 이해할 수 있을지, 아니 이해하기 전에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 가능할지 섣불리 단언하기 어려워진다. 이런 깊숙한 경지로까지 사색을 이끄는 렘의 솜씨는 그가 SF를 순수한 사고 실험으로서 적합한 형식이라 여겼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또한 렘은 신랄하고 독창적인 블랙유머의 대가이기도 했다. 한국에 소개된 바 있는 연작단편집 ‘사이버리아드’(1965)는 SF 풍자의 독보적인 경지를 보여준다. ‘사이버리아드’라는 제목은 ‘사이버’와 ‘일리아드’의 합성이다. 즉 고대 그리스의 대서사시를 컴퓨터 버전으로 다시 쓴 것이라 이해할 수 있는데, ‘사이버’라는 말이 컴퓨터 정보통신이 널리 보급된 90년대 이후에나 익숙해진 사실에 비추어보면 렘은 매우 선구적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서구의 SF는 타락했다
렘에게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그가 비록 동유럽 출신이지만 소련을 비롯한 옛 동구권의 경직된 사고에서 벗어난 것은 물론이고 영미권이나 기타 서구사회와도 다른 틀거지의 독보적인 SF 세계관과 사유를 발전시켜 왔다는 점이다. 그는 ‘과학과 문학의 결합’이 그동안 서구사회에서 빚어 온 SF라는 통속 장르로 한정되기에는 너무나 방대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거칠게 표현하자면 이제까지의 장르 SF는 서구 자본주의 대중문화의 패러다임 주변을 공전하며 자기소모, 자기소진의 과정을 밟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배경만 우주로 옮겨놓은 구태의연한 영웅담들은 차치하고라도, 과학기술의 기계적인 외삽이나 인간중심주의의 수평적 연장을 크게 넘어서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한 마디로 이들은 ‘철학’보다는 ‘산업’을 형성해 왔다고나 할까. 그러나 렘은 시종일관 이런 한계를 넘어서는 시도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예전에 커트 보니것은 렘을 가리켜 ‘인간성의 야만적인 측면에 오싹하도록 놀란, 극단적인 비관주의의 대가’라는 평을 내린 바 있는데, 사실 이 비관주의에는 서구 SF에 대한 실망도 상당히 배어 있었을 것이라는 심증이 간다.
기본적으로 렘은 인간이 지식의 범위를 넓혀나가고 계속 발전하기 위해서는 과학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견해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서양 SF작가들 대다수가 통속적인 엔터테인먼트에만 몰두하는 듯한 양상에 상당히 비판적 입장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솔라리스’를 비롯한 그의 방대한 저작들이야말로 렘 자신이 시도한, ‘가능한 한 가장 발전한 과학소설’의 모습일 터이다.
■한국 SF마니아에 세례 내린 작가
문학의 ‘풍자’와 ‘은유’가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가르쳐 준 작가. 나는 초등학생 때 그렇게 렘을 만났다. 40대 이상의 SF 팬들 중에는 ‘아이디어회관 SF전집’에 끼어 있던 렘의 ‘욘 박사 항성일기’를 기억하는 이들이 상당히 많다. 인공지능에게 완벽한 사회질서를 구현하라고 입력하자 전 국민을 원반으로 만들어 가지런히 배열해버린 외계 행성의 이야기라든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참고 항목들의 연쇄로 블랙홀이 되어버리고 마는 백과사전, 또 영문도 모르고 대피 훈련에 휘말렸다가 간첩 혐의를 받는 욘 박사 이야기 등등. 비록 어린이용으로 편집된 축약본이었지만 블랙유머와 풍자가 어떤 것인지를 제대로 배우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그 뒤 20대에 다시 접하게 된 렘은 또 다른 면모였다. ‘솔라리스’를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영화로 먼저 보았지만 그다지 깊은 인상을 못 받았는데, 나중에야 렘의 원작을 읽고는 사실상 다른 이야기임을 알게 되었다. ‘솔라리스’는 영화에서처럼 SF의 설정을 빌어 떠나보낸 연인을 기억하는 로맨틱 스토리가 아니라 인간의 사고와 인식의 한계를 다룬 심오한 철학적 탐구였다. 렘이 왜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못마땅해 했는지 충분히 수긍이 갔다. ‘우주는 인간의 인식을 초월하는 것’이라는 주제에 강렬한 울림을 느끼면서 ‘이 작가는 영미권 SF와는 뭔가 근본적으로 접근 방식이 다르구나’라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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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준 서울 SF아카이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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