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이 접듯 나뭇잎 꾹꾹 눌러 말아, 구멍 뚫은후 알 1~2개 낳고 마무리
▶ 알 낳자마자 땅에 요람 떨어뜨려, 적당히 발효돼 먹이로도 안성맞춤
잎에 앉아있는 왕거위벌레. 거위벌레는 목이 길고 배가 상대적으로 짧아 거위나 오리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국립생태원 제공>
도화지를 펴고 거위를 그려 볼까요. 긴 목과 삐죽거리는 입, 뒤뚱거리는 엉덩이가 먼저 떠오를 겁니다. 흔히 볼 수 있는 곤충 중에서도 목이 매우 길고 상대적으로 짧은 배 부분은 딱지날개로 감싸져 마치 거위나 오리를 연상케 하는 종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거위벌레라고 불리죠. 서양에서는 이 곤충 무리를 모두 묶어 ‘잎말이 바구미(leaf-rolling weevils)’라고 한답니다. 이 곤충이 알을 낳기 위해 잎을 말아 올리는 행동에 주목해 만든 이름인데요. 일본에서도 말아 올린 잎에 알을 낳은 뒤 땅으로 떨어뜨리는 모습을 보고 ‘물건을 떨어뜨린다’는 의미의 오또시부미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외형적 특징을 반영한 반면 서양이나 일본은 행동학적 특징을 중요시한 거죠.
■거위벌레와 바구미를 구분하는 법
거위벌레는 넓게 보면 바구미와 함께 딱정벌레목에 속하는 곤충입니다. 우리나라는 바구미 무리에서 독립된 무리로 분류하고 있지만 북한에서는 아직 이들을 바구미 무리의 일부분으로 여기기 때문에 이름도 ‘몽똑바구미’라고 지었습니다.
두 곤충은 얼핏 보기에는 비슷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거위벌레는 뒷짱구가 생긴 것처럼 머리 뒤쪽이 길게 늘어난 모양이고 바구미 무리는 주둥이가 길게 뻗어 있습니다. 더듬이를 한번 살펴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거위벌레 무리들은 더듬이가 항상 직선으로 뻗어 있지만 바구미 무리의 더듬이는 팔꿈치가 굽은듯한 ‘ㄱ(기역)’자 모양으로 생겼죠.
거위벌레의 친척뻘인 주둥이거위벌레과 곤충도 있는데요. 이 무리는 바구미처럼 주둥이가 길어 보이는 종류가 대다수입니다. 주둥이거위벌레과 곤충은 거위벌레처럼 잎을 말아서 알을 낳는 종도 있지만 과실이나 잎의 새싹, 꽃봉오리 등에 알을 낳거나 다른 곤충이 만들어놓은 요람에 알을 낳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는 현재까지 거위벌레과 31종, 주둥이거위벌레과는 45종이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거위벌레는 현란한 재단사이자 건축가
거위벌레과 곤충의 가장 큰 특징은 암컷이 알을 낳기 전 잎을 재단하고 돌돌 말아서 애벌레들을 위한 원통형 요람을 만들어 주는데 있습니다. 마치 포대기로 아이를 감싸는 것처럼요. 거위벌레가 만든 요람은 애벌레를 보호하는 집이 되고 먹이가 됩니다.
먹이가 될 만한 식물을 발견한 거위벌레 암컷은 잎 위를 상하좌우로 걸어 다니면서 크기와 신선도가 알을 낳기에 적당한지를 관찰합니다. 알을 낳을 잎을 결정하면 가장자리로 이동한 뒤 잎 가운데의 주맥 방향으로 자르기 시작합니다. 거위벌레의 종류에 따라 잎을 완전히 잘라내기도, 살짝 구멍만 뚫는 형태로 재단하기도 합니다. 거위벌레 암컷은 잎을 잘라낸 뒤라도 애벌레가 살아가기에 적당하지 않다는 판단이 서면 과감히 다른 잎으로 이동하기도 합니다.
잎 한쪽을 자른 뒤에는 반대쪽으로 옮겨 잎 뒷면에 상처를 내는데요. 접히기 어려운 잎이 잘 말려올라갈 수 있도록 준비하는 과정인데 마치 종이접기를 할 때 종이가 잘 접히도록 손으로 꾹꾹 눌러주는 것과 비슷합니다.
잎이 점점 시들기 시작하면 본격적으로 요람을 만들기 시작하는데요.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히 잎을 감아 올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미리 만들어놓은 꺾임선(상처)을 따라 정교하게 원통을 만듭니다. 잎을 두 세 겹쯤 말아올린 뒤에는 표면에 작은 구멍을 뚫어 요람의 중심부에 1~2개의 알을 낳은 뒤 다시 잎을 끝까지 말아 올립니다. 마지막으로 잎의 끝 부분을 뒤집어서 뚜껑을 만들어주면 됩니다.
거위벌레는 요람을 만들기 위해 1시간 40분에서 2시간 가량 잎 위에 매달려 분주히 움직입니다. 길이가 3㎜ 내외로 아주 작은 요람을 만드는 싸리남색거위벌레는 30~40분 정도면 충분하지만 큰 요람을 만드는 데는 시간이 더 걸립니다. 꼼꼼하게 잎을 고르고 오랜 시간동안 요람을 만드는 것이 꼭 아이에게 정성을 쏟는 우리 부모님의 모습을 닮았네요.
■요람은 최적의 요새이자 먹이감
거위벌레가 만든 요람은 애벌레가 살아갈 수 있는 집 역할을 합니다. 대다수의 거위벌레들은 요람을 만든 뒤 땅으로 떨어뜨리는데요. 땅에 떨어진 요람은 천적의 눈에도 덜 띄고 지표면의 습도가 그대로 전해져 애벌레가 살아가기에 최적의 환경이 되죠.
요람 안에서 부화한 애벌레는 습기로 인해 적당히 발효된 잎을 먹고 자랍니다. 이 가운데 남색거위벌레속에 속하는 종들은 암컷이 잎을 말아 올릴 때 곰팡이 포자를 붙이기도 합니다. 곰팡이 포자의 역할은 잎이 더 빨리 발효되도록 하는 것인데요. 이 종은 아주 작은 요람을 만들기 때문에 땅에 떨어졌을 때 금방 말라버릴 수 있어 곰팡이의 도움을 받는다고 합니다. 거위벌레의 요람은 최적의 요새이면서도 먹이가 되는 발효과학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이런 요람을 지켜보고 있는 이들도 있습니다. 바로 거위벌레 알 속에 알을 낳는 기생벌인데요. 기생벌들은 암컷이 요람을 지을 때 잎 주변을 서성이다 알을 낳는 순간을 포착해 얼른 들어가 알을 낳고 나옵니다. 거위벌레 알 표면에 거의 붙여서 알을 낳습니다. 이를 눈치채지 못한 암컷은 그대로 요람을 완성시키죠. 기생벌 알이 부화해서 애벌레가 나오면 거위벌레 알을 먹어 치웁니다.
■왜 거위벌레는 힘든 공사를 시작했을까
요람을 만드는 것은 애벌레를 효율적으로 길러내기 위한, 자손을 위한 거위벌레들만의 독특한 방식입니다. 이렇게 공을 들이는 대신 알의 수는 적지요. 마치 하나 낳아 잘 키우자는 예전의 가족계획 표어와도 같은 느낌이 듭니다.
거위벌레과 곤충의 친척 격인 주둥이거위벌레과 곤충들은 식물의 과실이나 꽃, 줄기, 어린 싹 등에 알을 낳는데요. 대표적인 곤충이 도토리에 구멍을 뚫은 뒤 거기다 알을 낳고, 그 도토리가 붙어있는 가지를 바닥에 떨어뜨리는 도토리거위벌레입니다.
주둥이거위벌레의 일종인 뿔거위벌레가 요람을 만들긴 하지만 거위벌레처럼 재단을 하지는 않고 세로로 대강 말아놓은 원시적인 형태이거나 잎을 여러장 붙여 마치 잎 덩어리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이들은 잎을 말면서 잎 표면에 10개 가량의 알을 여기저기 퍼뜨려 낳습니다. 이들은 적은 수의 알을 낳아 잘 키우는 쪽이 아닌 많은 수의 알을 낳는 방법을 선택한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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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영 국립생태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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