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립은 억압자를 도울 뿐 억압당하는 자를 돕지 않는다. 침묵은 고문하는 이를 도울 뿐 고문당하는 사람을 돕지 않는다. 가끔 우리는 간섭을 해야 한다.”
홀로코스트의 피해자였던 유대계 작가 엘리 위젤은 자신이 받았던 고통을 되풀이하지 않고자 폭력과 억압 그리고 인종차별에 맞서 왕성히 활동하여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그리고 그의 수상소감에는 누구의 편에도 서지 않는 중립적 자세에 대한 무책임을 비평한다.
요즘 들어 누군가와 대화를 할 때 중용의 자세를 취하는 이들이 참 많게 느껴진다. 이해는 한다. 우리는 수업시간에 발표를 권장 받음과 동시에 나의 의견을 피력하면 그 대답이 맞다 틀리다고 평가되어 따라오는 부끄러움을 겪으며 자라나야 했으니. 옳고 그르다는 것에 판단되지 않을 정도로만 뭉뚱그리며 대답하여 자신을 방어하는 일이 잦았을 것이다. 나 또한 평가되는 것이 두려워 몇년 전만 하더라도 어느 한 편에 서서 평을 내리는 일을 망설이곤 했다. 줄곧 그렇게 애매모호함으로 자신을 포장하다 문득 나의 정체성 또한 뚜렷하지 않게 느껴진 날이 있었다. 사실 마음속으로는 항상 누군가의 분명한 편이었지만 반박이 두려워 중립 뒤에 숨어버린 것이 용감하지 못하다고도 생각했다.
중립의 취지는 좋다.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쳐져 판단력이 흐려지는 것을 방지한다는 일념이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 중립적인 태도가 요즘 따라 야속하게 느껴진다. 양비론적인 말들은 모호함으로 태도를 숨겨 날선 싸움에 피해당하기 싫은 비겁함으로도 보인다. 나는 흑백논리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 중립이란 단어를 양측 모두 이해한다는 의미가 아닌 양측의 과실 모두 비판 어린 시선으로 검열하며 결과적으로 바른 판단으로 도달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인식해야 한다.
중립적 자세를 선호하는 사람들에게서 내가 본 모습은 모든 의견을 수용할 줄 안다는 자신감에 가려진 무지였다. 진실한 중용적인 자세의 결과인 바른 판단은 생략됐으며 양측 모두를 포용하는 이해심만 남았다. 의도치 않게 나의 이해심은 누군가에게는 화살이 된다. 그리고 어쩌면 그런 이해심은 침묵의 방관보다 더 도움되지 않는 억압자의 방패가 돼버린다. 적어도 양심이 있는 우리라면 상대적으로 눈에 더 훤히 아픔을 당한 피해자에게 가해자 측의 입장도 이해한다는 말로 이차적 가해를 입혀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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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연(UC버클리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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