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9월 말, 일찌감치 독감예방주사를 맞았다. 그러나 예방주사를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독감에 걸렸다. 글쎄, 무슨 독감이 걸렸다하면 혼까지 빼앗아 갔다. 11월 입동이 지나서야 겨우 정신이 들었다. 혼미했던 날을 보내고 그제야 창밖을 보았다.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유리창 밖 나뭇잎이 파랗게 돋아났다. 사람들은 다시 온 계절의 반가움을 기적이라고 한다. 나도 그렇다. 상상의 기적이 실제의 기적이라고.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 죽은 줄 알았더니 살아 있었던 것, 뉴스가 아니더라도 허다하게 만나는 일이다.
내가 지난 30대 때는 건강이 너무 나빴다. 어떤 명의도 고칠 수 없다 했다. 걸어도 걸어가도 걸음이 걸리지 않던 절망의 날들이었다. 나 자신도 나를 포기했다. 내가 나를 버려야 했었다. 그래서 기도원을 찾아 갔다. 기도하다 죽을 일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일 년 반쯤 다녔다.
함께 시를 쓰던 친구들이 찾아왔다. 그냥 이대로 둘 수 없다면서 막무가내로 어디론가 끌고 갔다. 병원이었다. 나는 나를 포기 했지만 친구들을 나를 포기 할 수 없다 했다. 종로3가 <함성숙 의원>이란 곳에 갔다. 의사 할머니 역시 외면했다. 집게로 나를 집으면서 겨우 처방해 주었다. 친구들 등쌀(?)에 하는 수 없이 끝판의 약을 처방받았다.
그런데 살았다. 친구들 때문에, 외면하면서 처방 해준 의사 때문에, 갈 곳 없어 할 수 없이 갔던 기도원 때문에, 모든 의사들이 외면하던 내가 살았다. 살아서 미국 이민 길에도 올랐다. 그리고 30년이 지났다. 나는 30년 전부터 매일이 기적이다.
5월이 왔다. 유리창 밖 앙상하게 흔들리던 나뭇가지도 잎이 푸르다. 집에서 세 블럭만 가면 허드슨 야드(Hud son Yards)라는 맨하탄의 새로운 명소가 생겼다. 백층짜리 빌딩들이 줄줄이 마무리를 하고 있다. 그 중 제일 먼저 지난 3월 베슬(Vessel)이란 벌집모양 계단식 건물이 문을 열었다. ‘베슬’에 올라가 보았다. 5월 모두의 기적을 빌며 졸작 시 한편을 썼다.
그가 거기 서 있다. / 풀 한 포기, 물 한 모금, / 꽃 한 송이, / 꿀 한 방울 없는 텅텅 빈 벌집, / 2500개의 계단으로 서 있다. // 나는 왜 그가 거기 서 있는지 모른다. / 내가 한 때 아무리 걷고 걸어도 / 그 자리에 서 있던 때가 있었다는 사실을 / 상기시켰을 뿐이다. / 사방이 막막하던 때, / 끝없는 ‘뫼비우스의 띠’를 걷고 걸었을 / 뿐인 기억을 // 사람들은 앞 다투어 거기로 갔다. / 2500개의 계단을 올라갔다. / 올라가고 또 올라가 보았지만 / 되돌아서야 하는 계단, / 헐레벌떡 오르고 올라도 닿는 곳이 없는 / 돌아서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 그들은 모두 어디에 닿고 싶은 걸까? // 나는 그를 믿지 않는다. 절대로, / 결심을 하면서 / 헉헉거리면서 오른 벌집 꼭대기 / 그는 없고 하늘만 있다.
<최정자/펜클럽 전 미동부지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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