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창호, <혁명의 전구>, 조선화, 조선미술박물관 소장
코리아반도의 산수화는 어떻게 계승되어 왔는가. 이조 시기에 발전해 온 진경 산수화는 사회의 정신적 지주였던 주자학에 의탁해 ‘대상에 대한 객관적 해석’으로 발전했다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산세의 놓여 있는 그대로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화가의 눈으로 재정립된 산수를 그렸기에 나는 오히려 ‘대상을 내가 주체가 되어 파악’하는 양명학의 이론에 가깝다고 본다. 어찌됐든 진경 산수화는 겸재 정선(1676-1759)에 의해 정리되면서 독특한 화풍을 형성하게 된다.
그후 김홍도(1745-1806), 김정희(1786-1856) 풍의 산수화가 등장하면서 과거 산수화풍에 대한 회의(懷疑)를 발판으로 발전을 거듭해왔다. 근대에 들어, 허유(1809-1892), 허백련(1891-1977), 이상범(1897-1972), 변관식(1899-1978)을 거치면서 작가의 개성이 들어간 화풍으로 20세기를 장식했다.
그러면, 해방 후 70여년 간 북한이 풍경화라 부르는 산수화는 어떤 양태를 보이고 있는가. 북한 역시 작가의 개성 넘치는 산수화를 발전시켜왔다. 리석호, 김춘전, 김성근, 리창, 리경남, 선우영, 정창모, 문정웅, 정영만, 최창호 등이 중심에 서 있다.
산수에 대한 이들 작가들의 다양한 해석은 ‘붕어빵을 찍어내는 북한 미술’이란 비판의 정당성이 설 자리를 잃게 만든다. 이 중 산수화의 경지를 최고조로 독특하게 발전시킨 화가는 선우영과 최창호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최창호의 화풍은 코리아반도의 근·현대 동양화 전체를 조명해 볼 때, 과거의 정선-김정희-허백련-이상범-변관식, 그리고 현대 산수화 작가로 대변되는 반도 전체의 산수화 품격을 휘휘 저어 한꺼번에 들이마신 후 내뱉어 놓았는데, 그 어디에도 전통의 숨소리는 들리지 않고 웅혼한 붓바람이 귀기(鬼氣)를 타고 겨울 삭풍처럼 불어온다. 전통의 거침 없는 유린, 혼절할 자유가 춤추고 있을 뿐이다.
*(‘코리아반도’는 한국에서 부르는 ‘한반도’ 북한에서 부르는 ‘조선반도’를 아우르는 명칭으로 제가 오래전부터 강연 때 사용해오고 있는 단어입니다. 두 지역이 각기 독립된 국가이기에 ‘한반도(한국의 반도)’라고 표기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 저의 견해입니다. 물론 ‘조선반도’ 역시 억지스러운 명칭이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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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범강 / 조지타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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