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고모님이 별세하여 텍사스 주 휴스턴(Houston)으로 가기 위해 아내와 함께 뉴저지 뉴왁 공항에 왔다. 휴가철이라 수많은 사람들로 공항이 붐볐다. 이전 비행기들이 연발하여 우리가 타려던 항공기의 출발 시간이 몇시간 후로 여러번 지연됐다.
인터넷으로 검색하니 뉴욕 라과디아 공항에서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되어 우버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새로 지은 라과디아 공항은 이전보다 내부가 훨씬 크고 시설도 디자인도 잘 되어 있어 아름답고 쾌적했다.
내가 오래 전에 처음으로 휴스턴을 방문했을 때 아내의 고모님과 고모부님을 처음으로 뵈었고, 13년 전에 방문했을 때는 고모부님께서 단신으로 이북에서 월남하던 이야기를 실감나게 하시어 감명 깊게 들었었다.
휴스턴 공항에 내려 마중나온 아내의 고종사촌동생을 반갑게 만났다. 고모님의 남편인 목사님은 2년 전에, 맏아들은 1년 전에 먼저 하늘나라로 떠났다. 고모님은 외출을 삼가고 작은 아들과 함께 주로 집안에만 있다가, 피트니스 센터(Fitness Center)에서 운동하던 중에 넘어져 병원에 입원한 지 이틀만에 별세하셨다고 한다.
재작년부터 매해 사랑하는 가족을 하나씩 잃은 고종사촌 동생에게 깊은 위로의 말을 전했다. 고모님 댁으로 가 기도를 드리고 나서 집안을 둘러보았다. 이전에 왔을 때 보았던 사진들이 장식장에 그대로 있었다. 침실에 들어가서 옷장에 있는 옷들도 보았다. 흔적은 그대로 남아 있으나 여기에 지금 살아 계시지 않으니 그립고 아쉽다.
1938년 한국에서 태어난 아내의 고모님은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의 어려운 시기를 겪었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큰오빠 집에서 살다가 독립하여 선교단체에서 고아들을 돌보는 일을 했다. 그곳에서 만난 미국인 선교사가 수양 딸로 삼아 대학교육도 시켰고, 목사님을 소개해서 결혼했다.
미국인 선교사님이 은인이었다. 고모님은 남편인 목사님이 휴스턴에서 목회하게 되어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미국에 왔었다. 장례예배에 미국인과 한인이 거의 60여명씩 참석했고 미국인 목사님의 집례로 진행되었다.
고모님은 21년 동안 병원 실험실에서 근무한 후 은퇴했다. 남편인 목사님이 성도들을 심방할 때 동행하는 등 목사 사모의 역할도 했다. 체구는 작았지만 강인했다. 가족과 친구들의 사랑, 건강, 안전, 자유 등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에 감사했다고 한다.
하관예배에서 목사님이 고모님의 영혼은 이미 천국에 갔으며 육체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예배 후에 미리 파 놓은 곳으로 관이 내려간 후, 한 사람씩 앞으로 나가 꽃 한 송이씩 관으로 떨구었다. 우리는 일하는 사람들이 흙을 덮고 떼를 입히고 비석을 놓을 때까지 지켜보다가 떠났다.
뉴욕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생각한다. 고모님은 신앙심이 깊었으며 보통사람으로 삶을 성실하게 살았으니 천국에 오르셨으리라 믿는다. 누구나 이 세상에서 유한한 기간을 살다 죽음을 맞이한다.
죽음을 평소에 생각할수록 삶도 성실하게, 넉넉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삶은 여행이다. 죽음은 이 세상에서의 삶의 여정을 마치고, 보이는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세상으로 떠나는 과정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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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관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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