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번역’이라는 말을 떠올리면 대개 근대 이후 외국 문학 번역이나 현대 통역가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한국의 번역 전통은 놀라울 만큼 오래되어 세계적으로도 드문 양상을 보여준다. 문자 기록이 본격화된 삼국시대부터 이미 우리 조상들은 ‘번역’을 통해 외래 사상을 자기 언어로 받아들이고, 다시 백성들에게 전파하는 작업을 꾸준히 이어왔다.
한글 창제 이전에 우리는 이미 한자를 주요 문자로 사용했다. 기원전 1200년경 동이족이 광범위하게 분포하던 산둥·요동 지역에서 나타난 갑골문(甲骨文)에서 비롯된 상형문자가 그 뿌리였다. 따라서 중원 지역과 기본적인 문자 체계는 같았으나, 발음(音)과 풀이(訓)는 우리말 체계에 맞추었다. 특히 우리 고유의 훈차(訓借) 방식을 활용해 한자를 우리말로 읽어내는 독자적 전통이 형성되었고, 이것이 훗날 구결·향찰·이두의 바탕이 되었다.
삼국시대 불교 전래는 곧 번역의 역사였다. 승려들은 한문 경전을 강론하며 구결(口訣)과 향찰(鄕札)로 우리말 풀이를 덧붙였다. 향가 속 불교 어휘와 원효·의상의 설법은 이런 구두 번역의 흔적이다.
고려시대에도 번역은 이어졌다. 『향약구급방』(1236)은 송의 의학서를 토대로 하되 우리 약재와 풀이를 덧붙였고, 『삼국사기』·『삼국유사』 역시 구결을 통해 사실상 교육이 이루어졌다.
이 오래된 흐름이 본격적인 ‘번역본’으로 꽃핀 것은 조선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1443~46) 이후였다. 문자라는 도구가 생기자 국가는 적극적으로 언해본(諺解本)을 제작했다. 『석보상절(釋譜詳節)』(1447)은 세종의 명으로 수양대군이 편찬한 석가모니의 일대기서로, 현존하는 가장 이른 불경 언해본이다. 이어 『월인석보(月印釋譜)』(1459)는 찬불가와 경전을 합쳐 대규모 번역서로 완성됐다. 불교뿐 아니라 유교 경전도 번역됐다.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는 충·효·열의 사례를 그림과 함께 한글로 풀이했고, 『소학언해』와 『명심보감언해』, 그리고 『논어·맹자·대학·중용 언해본』은 조선 선비들의 교과서로 널리 읽혔다.
실용 지식의 편찬도 활발했다. 『농사직설』(1429)은 한국식 농법의 최초 농서였고,『향약집성방』으로 의학 지식을 풀어 보급했다. 또한 『동국통감언해』, 『두시언해』, 『당송팔대가문초언해』로 역사와 문학을 번역해 백성의 지식에기여했다.
근대에 들어와 서구 문물이 밀려들자, 번역은 거대한 물결이 되었다. 신문과 교과서, 성경과 소설 등이 한글로 옮겨지면서 새로운 지식과 사상이 사회로 확산됐다. 이제 번역은 외래 문헌을 소개하는 수단을 넘어, 근대적 의식과 국민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오늘날 우리는 번역을 통해 세계 문학을 접한다. 그러나 그 뿌리는 이미 오래 전부터 깊게 내려 있었다. 번역지향은 단순한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타자의 사상을 자기 언어로 끌어안는 적극적인 문화적 선택이었다. 바로 그 전통 위에서 지금의 한국 문학과 학문, 우리의 언어생활이 서 있다.
이제 우리는 인공지능으로 번역이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동시번역의 시대에 들어섰다. 속도가 더해진 번역을 통해 상대 문화와 정신을 존중하며 이해하는 태도를 지켜나갈 때, 우리의 번역전통은 바른 방향으로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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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선 서북미문인협회 회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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