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기를 활짝 펴면, 김장김치가 물릴 쯤 이면, 할머니는 보기만 해도 식욕 충만의 열무김치를 담그시곤 했다. 나는 늘 할머니와 한 방에 기거, 할머니의 깊으신 애정 속에 자랐다. 그래왔던 내가 결혼 후 훌쩍 떠났으니, 할머니에겐 오죽이나 큰 내 빈자리가 근심걱정으로만 보이셨을까!
내가 결혼 후 첫해 봄, “딩동”해서 나가보니 대문가에서 할머니가 눈물이 그렁그렁해지시며 말하셨다. “잘 지내냐? 열무김치가 맛있게 익어서 갖고 왔다” 무엇이던 먹이고 싶은 마음이 사랑이라지만, 도보로 10분 거리라지만, 무거운 열무김치 통을 들고 허위허위 걸어오셨으니⋯ 할머니의 첫 방문 선물은 그렇듯 지극하신 사랑이 가득한 열무김치였던 셈이다.
1983년도에 우린 호주의 Perth 지사로 나가 살게 됐다. 당시 퍼스엔 한국식품점도 한국식당도 전무상태였다. 그래서 김치의 갈증도 단 하나 존재하는 중국식품점의 길쭉한 중국 무와 배추로 담근 깍두기와 막김치로 해갈했다.
허나 총각김치와 열무김치는 언감생심이었다. 그래도 방울 같은 빨강 래디시로 어느 정도 총각김치의 운치를 흉내 냈지만, 열무김치는 ‘대체자료’조차 없는 완전 불가능의 영역이었다.
그러던 차 다른 회사의 지사로 나온 가정의 초대로 갔던 집에서 깜짝 놀랐다. 알고 보니 그 집 부인과 나의 부모님들이 고향인 원주서부터 교분이 두터웠던 관계였다.
설명하자면 일제 강점기 때, 간호사였던 엄마랑 같은 학교에 근무했던 야다니 선생이란 분이, 바로 오늘 방문한집 부인의 부친이셨던 것. 또 나도 어릴 때 엄마랑 돈암동의 야다니 선생 집에 잘 놀러갔었고, 그 집 딸을 만났던 기억까지 나니, 우린 구면인 처지였다.
그 야다니 선생과 얽힌 재밌는 일화도 알고 있다. 우리 아버지 쪽 친척아저씨가 병원에서 간호사인 엄마를 예쁘게 보시곤, 집에서 아버지와 엄마의 첫 만남을 주선하셨단다.
그때 옆집에 사시던 야다니 선생이, 대뜸 댓돌 위에 놓인 아버지 신발 안에 엄마신발을 얹어 놓으시며 “이렇게 하면 두 분이 꼭 성사될 거다”하셨단다. 그 주술(?)덕인지 하여간 야다니 선생이 우리 6형제 탄생배경의 일등공신(?)이 됐다는 스토리다.
그랬는데 수십 년 후 돌고 돌아, 그 선생의 첫째 딸과 엄마의 둘째딸인 내가 그 먼 호주에서 해후하게 될 줄, 그 누가 상상인들 했을까! 더 놀랐던 건 식탁에 오른 새파란 열무김치를 보고서다. 몇 년 만에 맛 본 열무김치의 맛은 표현불가였다.
“아니 열무를 어디서 구하셨냐?”물으니 시드니에서 오신 분한테 씨앗을 얻어 키운 거란다. 뜰에 나가보니 풀장 뒤쪽 구석, 소꿉장난 같은 텃밭에서 초록 열무들이 한창 키 자랑 경연대회 중이었다.
그 손바닥만 한 밭에서 수확한 귀하디귀한 열무김치니 크나큰 사랑의 선물이 아닌가. 그 후 미국으로 이주한 후, 애들 키우며 정신없이 살다보니 야다니 선생의 딸네와도 연락두절이 됐다. 그저 무소식이 희소식으로 어디서든 잘 살고 있으려니 한다.
할머니는 우리가 미국으로 이주했던 그 해에 먼 길로 떠나셨고, 세월이 가며 부모님마저 무지개 너머로 가셨다. 그런 내게 사랑의 열무김치가 뒤늦게 또 찾아왔다. 토요일 새벽산행팀장이던 음식솜씨 좋고 다감한 친구가, 모시인절미와 곁들여 먹으라며 갖고 왔던 열무김치다.
땀 흘리며 강행군한 후에 맛본 잊지 못할 환상의 맛이었으니까. 그랬던 친구가 느닷없이 하늘로 떠나버린 지 어언 3년째다. 인제는 할머니표, 엄마표, 친구표 열무김치까지 영영 이별이었다. 그래서 이맘때면, 열무만 보면, 그리움과 슬픔이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옹달샘마냥 끊임없이 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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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인숙/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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