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 한인들의 북한방문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1979년 평양탁구대회가 시발이었다.
당시 지금은 타계한 노의선 목사와 캐나다에서 뉴코리아타임스 발행인으로 활동하던 전충임씨등 수명이 북한을 방문했고 이 과정에서 이산가족 상봉문제가 해외에서는 처음으로 제기했다. 북한방문을 마치고 캐나다로 돌아온 전충임씨는 이듬해 이산가족의 방북을 적극적으로 추진했으며 이에 참가한 대부분의 한인은 미주출신이었다.
1986년 ‘조국통일 북미주협회’가 결성되면서 미주한인들의 북한방문은 최고조를 이루게 됐다. 이후 88년 전금여행사의 북한 산업관광단의 북한 방문, 89년 재미남가주산악회(회장 감관)와 본보가 주관한 금강산 등반, 91년 9월 LA한인상공회의소 회원들을 중심으로 한 북한방문, 재미경제인연합회의 북한투자산업시찰 등으로 이어지면서 미주한인사회의 북한 방문이 절정에 달했다. 92년 11월까지 무려 5,000여명의 미주지역 한인들이 북한을 방문한 것으로 집계됐다.
그러나 93년 북한의 핵개발 의혹이 제기되면서 북-미 관계가 냉각돼 방북은 사실상 중단됐으나 친북인사들로 구성된 ‘재미동포 전국연합’을 통한 대북접촉은 꾸준히 이어왔다. 1995년 북한 홍수와 기아로 북한을 돕기 위한 미주한인사회의 온정의 손길이 이어지면서 종교계를 중심으로 북한방문과 북한의 나진-선봉 지역 투자유치로 제한적으로 일부 인사를 중심으로 한 북한방문이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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