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나 드라마에서 배우들은 자기가 맡은 배역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의 인물로 나타난다. 한 사람의 배우가 어떤 때는 왕이나 대기업체의 회장 등 카리스마적인 역할을 하는가 하면 어떤 때는 평범한 가장, 심지어는 초라한 실패자의 역을 맡아서 연기하기도 한다. 어떤 역이 주어지든 그 역할을 잘 소화하여 연기로 잘 표현하는 배우를 명배우라고 하는데 주연만 명배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조연에도 명배우가 있다. 연기상에는 주연상과 함께 조연상도 있다.

사람마다 살아가는 인생도 한 편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요즘 TV에서는 사람의 인생실화를 극화한 프로그램을 방영하고 있지만 수십년 동안 이 세상을 살아온 사람의 스토리 치고 드라마가 아닌 것이 없다. 온갖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지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성공도 하고 실패도 하면서 환희와 비애를 맛본 각자의 인생 드라마에서 모든 사람이 주연을 해 온 셈이다.

또 사람들은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전개되는 드라마에서 각자의 배역을 맡아 연기하는 배우들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화려한 주역을 맡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볼품 없는 조역을 맡기도 하지만 하나의 스토리 속에서 자신이 맡은 배역을 수행해 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드라마의 스토리가 시나리오에 따라 전개되어 나가듯이 인생 드라마에도 시나리오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시나리오가 사정에 따라 수정되는 경우가 있듯이 인생의 전개에 따라 인생 드라마의 시나리오도 바뀐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세상에 태어날 때 자기의 뜻대로 귀족 집안이나 부자집의 자녀로 태어날 수 있다면 그런 인생의 출발을 원치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출발한 사람은 대체로 인생 드라마의 좋은 배역을 맡아서 안락한 인생을 보낸다. 반대로 자신이 원하지도 않았는데 열악하고 비천한 환경에서 태어나 평생을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좋은 환경에서 출발하지만 마감이 좋지 않은 인생이 있는가 하면 비록 어려운 환경에서 시작하지만 화려하게 대미를 장식하는 인생도 있다.

그러고 보면 사람이 세상에서 어떤 배역을 맡는 것은 반드시 그 사람의 질적 우열 때문만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물 흐르듯이 흐르는 세월 속을 떠내려 가면서 또 거슬러 헤엄치다가 만나고 헤어지고 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배역이 나타나고 또 바꾸어지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 나의 처지가 남보다 좋다고 하여 결코 오만해서는 안 될 일이며 형편이 어렵다고 하여 비굴해질 필요도 없다.

미국과 같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직업의 귀천을 크게 가리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사람의 직업은 그 사람이 사회적으로 수행하는 기능이며 생활 수단일 뿐이다. 그 사람의 인격과 직업을 동일시 하지 않는 것이다. 똑같은 사람이 왕과 노예의 연기를 모두 잘 할 수 있듯이 인생에서도 노동자가 얼마든지 사장을 할 수가 있다. 한 때 사형수가 대통령이 된 예를 우리는 지금 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배역을 맡더라도 그 배역을 잘 소화하여 나름대로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 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이 얼마나 멋지고 여유있는 인생인가.

특히 이 순간 인생살이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바울처럼 인생 드라마의 어려운 배역을 잘 견디어 내고 보다 좋은 역을 맡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