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인데, 마음은 봄이 왔는데, 날씨는 아직 한겨울이다.
폭설 주의보가 내린 6일 아침, 푸슬푸슬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보다가 문뜩 이 모습이, 언젠가 지나쳤던, 언젠가 지나온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 설날을 앞둔 어린 시절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하얀 블라우스와 끈 달린 자주색 스커트의 설빔을 입고 마당에서 “펄펄 눈이 옵니다---하늘나라 선녀님들이--”를 부르며 신이 났는데 부엌에선 음식을 장만하는 고소한 냄새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침에 떡가루처럼 내리던 눈이 오후에는 진눈깨비로 변했다. 이 역시 낮게 내려앉은 하늘, 웬 지 고즈넉하고 가라앉은 분위기가 정확하게 언제였는지 잡히지 않으면서도 낯익은 것이 어느 시절, 어느 날인가 스쳐왔었고, 누군가 따스한 존재가 옆에 있었다.
1959년 9월, 태풍 사라호가 한반도를 삼켜버리고자 강풍과 폭우를 몰고 왔을 때 방안의 이불 속에서 들었던 바람 소리는 어린 나이인데도 비교적 기억이 정확하다.
공장 건물이 날아가고 굴뚝이 무너졌다는 어른들 말소리가 두런두런한 가운데 마당의 대야가 날아가 쨍그렁 부딪치는 소리, 툭 하고 둔탁한 물건이 넘어가는 소리, 그것들은 무서움보다는 바깥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생생하게 살아있다.
이러한 날씨와 연관된 기억 속에는 늘 가족들이 있다. 그리고 고향이 있다. 밖에는 천둥번개가 몰아쳐도 방안에서 따스한 체온을 나누며 막 구워낸 따끈한 음식을 먹던 기억,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있던 그 자리, 살아오면서 힘들 때면 언제나 가장 돌아가고 싶은 자리는 그곳이다.
실제로 갈 수 있는 고향이든, 마음에만 남아 있는 고향이든, 추억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그런데 지금 미국에서 자라고 태어난 아이에게 고향이란 어떤 존재일까?
언젠가 자리를 함께 한 한인 학부모들과 미국에서 자라는 아이들의 고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들 모두, 이곳에서 자라는 아이들의 고향의 개념에 대해 염려했다.
처음 이민 와서는 한인밀집 지역에서 몇 년 살다가 학교 갈 나이가 되면 학군 좋은 동네를 찾아 뉴저지로, 롱아일랜드로 이사 가고 또 몇 년 후에는 기반 잡은 부모의 경제 형편에 따라 이사 가고, 이곳 저곳으로 때로는 타주로까지 떠돌아다니며 살고 있는 아이들이 많다.
또 새벽같이 장사 나갔다가 잠들면 오는 부모, 방과후 빈집에서 종일 TV와 인터넷, 게임에만 매달려 있는 아이, 부모와 몇 날 며칠이 가도 나누는 말이라곤 고작 서너 마디, 온가족이 함께 어딘가를 가본 기억이 가물가물하다면,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고향이란 것이 생길 사이가 있을까.
이들에게 아마 고향이란 한국학교에서 배운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라는 노래로만 남아있을 지도 모른다.
뉴욕에서 태어났거나 어려서 미국에 온 아이들에게 고향을 만들어주자.
폭설이 내리던 날 맛있는 것을 먹으러 온 가족이 거리로 나섰던 일, 브로드웨이 극장으로 어린이 뮤지컬을 보러나갔던 일, 동네 언덕에서 미끄럼을 타던 일, 가족 여행을 하며 멋진 광경을 보았던 일 등등. 그때 보았던 거리, 풍경, 나눈 이야기, 이것들이 쌓여 고향이 된다. 추억은 이렇게 만들어지고 고향은 이렇게 생겨난다.
아이에게 이런 기억들을 많이 만들어주려면 아무리 바쁜 이민생활이지만 부모는 아이와 좀더 많은 시간을 보내어야 한다.
아무런 걱정 없이 그저 무럭무럭 자라기만 하면 되던 때 부모와의 기억은 살면서 어떤 어려움과 고통도 극복하게 하고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을 평온하게 한다.
요즘처럼 때아닌 눈이 내리는 날도, 날씨와 상관없이 아이에게 패밀리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추억거리를 찾아주자.
원천적인 그리움의 정점, 어른이 되어 살면서도 무언가 마음을 끌어당기고 돌아가고 싶은 고향을 만들어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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