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있으면 6.25를 맞는다. 전쟁 3년 1개월이란 기간 동안 크고 작은 일들이 많았지만 전쟁이 더 오래가지 않고 휴전이 되어 그나마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휴전이 성립될 수 있었던 이유 중에는 워커중장을 포함한 수많은 미군이 전사하거나 윌리암 딘 소장(당시 미 24사단장) 외 많은 미군병사들이 포로로 잡혀가 미국 당국이 이들을 생환하기 위한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고 본다.
당시 남한의 육군참모총장(사실은 육·해·공군 총 지휘)은 소장인 채병덕 장군이나 정일권 장군이 지휘하던 때, 북한을 지원 참전하던 중공 당국이 포로로 잡은 딘 소장 같은 미군의 최고급 장교를 쉽게 돌려줄 이유가 없었던 때 천신만고 끝에 우리 국군이 중공군 남(南)중좌(당시 중공군 군단장급)를 생포하게 되었다.
이에 다급해진 중공당국은 휴전협상 진행에 빠르게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에 전쟁이 반년 혹은 1년을 더 계속했다면 수많은 군인과 민간인의 사상자는 물론 남쪽의 작은 국토는 잿더미가 돼버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중공군 중좌를 포로로 잡은 사람에 대해서 이름도 모르고 있다. 그래서 대한민국 국군 전사에 수록돼 있는 6.25전쟁 당시 중공군 남중좌를 무기나 트랩을 이용하지 않고 맨손으로 생포한 수도사단 소속 병사를 소개한다. 김기운이란 당시 일등병으로 그는 남중좌 생포시 적이 발사한 권총에 의하여 오른손 엄지손가락이 송두리째 잘려 나간 상황에서도 적의 허리춤을 놓지 않고 중공군의 산 위 고지에서 산 밑에 있는 아군 수색대 초병소까지 업치락 뒤치락 6시간여만에 끌고 내려 왔다고 하니 그 뛰어난 용맹과 투지를 우리로서는 잊어서는 안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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