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두레]
▶ 윤세욱 (새크라멘토 고불사 총무)
불교 방송국을 어렵게 운영하시던 분의 장례식에 참석하였다가 뒤차의 범퍼를 우그려 뜨렷다. 일전짜리도 안 되는 예의를 차리려다 몇 백불 짜리 손해를 보게 되었다는 짜증에 건성건성 사과를 하고 보험증서와 전화번호를 주고받았다.
다음날 보험회사의 조언대로 상대편에게 자동차 견적서를 부탁하였더니, 얼마간 할인까지 해준 견적서가 왔다. 이젠 돈이 문제였다. 범퍼를 바꾸는 것이니 작은 돈도 아니었고, 월말이라 사방으로 처리해야 할 청구서로 은행잔고가 빠듯했다. 하는 수 없이 수표 날짜를 좀 연기해 달라고 사정하였더니, 상대편은 뜻밖에도 선선히 응해 주었다.
세상사가 올바르게 돌아가고 있는 것은 틀림없지만, 때로는 돌아가는 틈바귀 사이에서 조금은 공정하지 못한 일들도 있다. 가해자는 오기로 기세가 등등하고, 피해자는 공손한 마음으로 주눅이 드는 경우도 있다. 이런 모순에 다소라도 저항하는 것이 그래도 올바른 자세일 것 같아, 이리 저리 돈을 만들었다. 내 딴에는, 적어도 나라는 사람이 이 정도의 양식은 있고, 이 정도의 능력은 있는 사람이니까 어느 정도의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과시하면서, 언제든지 수표를 넣어도 좋다고 으스대듯 연락하였다.
그 동안 살아오면서, ‘나는 저렇게 해야지’ 하는 진한 감동을 안겨준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 사람들 덕으로 삶의 지혜를 얻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렇게 바보 같은 사람도 있을까. 흔히 우리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상식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을 바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사람의 상식은 내 상식과는 차원이 달았다. 주말에 우그러진 범퍼를 펴니깐, 제대로 되어서 페인트를 사다 뿌렸더니 차가 감쪽같이 고쳐 졌다며 수표를 돌려 보내겠단다.
우리 삶을 따듯하고 살맛 나게 해주는 것이 도와 덕이라면, 도는 근본적인 씨앗 같은 것이고 덕은 노력으로 가꾸어 내는 향기 같은 것이다. 보험처리를 하지 않은 것도 고맙고 수표날짜를 연기하여 준 것도 감사한데, 이미 받은 수표를 돌려주겠다니 매사를 내 상식대로 판단하던 머리로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마치 옛날 나무꾼 동화의 “금도끼냐? 은도끼냐?” 같은 양심 테스트를 받는 것 같아, ‘그러면 그냥 쓰시라’고 하였더니 범퍼가 깨끗해졌는데 돈을 받을 이유가 없단다. 내 상식으로는 충분한 이유가 되는데, 그 사람 상식으로는 안 된단다. 내 자존심도 꿈틀했지만, 이런 엄청난 바보에게 이 세상은 너무 추운 듯 하여 다시 ‘그냥 쓰시라’고 권하였더니 돌아가신 분의 장례식에 참석해준 답례란다.
그 사람은 고인의 가족도 아니었다. 나이로 미루어 친구도 아니었다. 나와는 인사도 없었다. 앞으로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도 없을 것이다. 다만 장례식에서 만났으니 같은 종교를 갖고 있을 것이라는 추측뿐, 다른 종교인 일 수도 있다.
능률과 효과가 우선돼 칼날 같은, 나보다도 한참 젊은데, 값비싼 자동차도 아니었는데, 그토록 진한 향기를 지닐 수 있다니. 지금껏 인사치레에 급급했던 삶이 부끄럽다. 더 부끄러워지기 전에 수표의 반만이라도 가난한 이웃에게 전해야겠다.
온갖 꽃들이 부활하여 하늘이 더욱 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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