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월드컵이 폐막한지 2주가 됐는데도 아직도 월드컵의 열기는 식을 줄 모르고 있다. 월드컵 특집 책자가 발행돼 인기리에 배부되고 있으며 월드컵 사진전이 성황을 이루고 있다. 기자 수첩이 나오는 본지 오피니언난에도 월드컵에 대한 컬럼이나 독자의 글이 1~3개씩은 지금도 매일 등장한다.
월드컵 한국팀의 선전에 대해서는 누구든 그 감동과 환희가 똑같았겠지만 나는 좀더 다른 이유에서 이번에 한국팀을 열렬히 응원했다. 사실 축구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고 월드컵이 열리기 전까지만 해도 대표선수 중 이름을 알고 있는 선수는 2~3명에 불과했다. 초등학교 6학년때 이민을 온 1.5세인 기자는 한국팀보다는 미국팀 선수들의 이름이 귀에 익숙했다.
한국팀 선수 중 그나마 유일하게 잘 알고 또한 그의 팬이라고 자처하고 있는 선수는 다름 아닌 홍명보. 그가 지능적인 플레이를 펼치고 아시아선수 최초로 월드컵 개인상(브론즈볼)을 수상했다든지, 운동선수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 한국 축구 외교를 위해 힘쓰고 있다는 점 때문에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와 특별한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기자는 홍명보가 현재의 아내와 두 아들을 낳으면서 행복하게 가정을 이루고 있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니깐 간접적으로 그들의 중매를 했다.
홍명보의 장인과 기자의 부친은 모두 한국 방송계 출신으로 지금도 서로 각별한 사이다. 홍 선수의 장인이 지난 90년대 중순 미국으로 처음 이민을 왔을 때 친구가 변변치 않았던 그의 딸 조수미씨를 천주교 미혼자들의 모임인 ‘선택’이라는 프로그램에 초청했다.
그 모임에는 현재 한국의 모 스포츠 일간지에서 축구 전문기자로 일하는 나의 친구도 있었는데 마침 미국 전지 훈련차 한국에서 온 국가대표 축구선수들을 수미씨가 보고 싶다고 해서 나의 친구가 두 사람의 만남을 주선했다.
수미씨는 처음에는 황선홍을 보고 싶어했으나 부상으로 전지 훈련에 참가하지 못해 ‘꿩 대신 닭’으로 홍명보가 호텔 로비에 나왔다. 사람 좋은 홍명보는 수미씨에게 사인볼과 대표팀 자켓을 선사했으며 그들은 가끔 국제전화로 통화를 나누다가 사이가 급진전해 2년만 결혼에 성공했다. 미국에 있는 처갓집을 자주 방문하는 홍명보는 “LA가 제2의 고향 같다”고 말하고 있다.
중매를 잘못서면 뺨을 3대 맞고, 잘하면 쌀을 3말 받는다고 했는데 행복한 가정을 꾸린 홍명보가 월드컵 4강에 수훈을 세웠으니 이 친구가 중매 빚 하나는 톡톡히 잘 갚은 셈이다.
doopae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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